불꽃튀는 논쟁… 타오르는 공론… 2006 지식인 大戰

  • 입력 2006년 11월 3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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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국 지식인 사회는 치열한 논쟁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들 논쟁은 비판의 대상을 직접 호명하는 실명 비판이라는 점에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논쟁의 긴장도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과거 논쟁에서 주로 다루었던 자유냐 평등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국가냐 시장이냐 등의 전통적 주제와 성격과도 매우 판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난 1년간 논쟁의 주제를 보면 평화냐 통일이냐(최장집 대 백낙청), 통일이냐 선진화냐(백낙청 대 안병직), 민족이냐 국가냐(신용하 대 안병직·이영훈), 국가냐 민중이냐(이영훈 대 최장집), 국가냐 개인이냐(이영훈 대 윤해동) 등으로 다원화, 복합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들 논쟁은 보수-진보, 좌-우 등 한국 지식사회의 전통적 구도를 넘어 전방위적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도 차별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 논쟁이 한국 지식사회의 지형도를 바꿀 만큼 파급력이 클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또 “내년 대선의 전초전 성격을 띤 지식 권력의 세력 다툼일 뿐”이라는 비판적 관전평도 제기된다. 지식인 사회를 달구는 각종 논쟁의 양상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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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꼬 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좌파 민족주의 비판으로 현대사 논쟁 불지펴

올해 지식인 사회 논쟁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2월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사)을 비판하면서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이다.

박지향(서울대), 김철(연세대), 김일영(성균관대), 이영훈(서울대) 교수 등 4인의 편집위원이 중심이 돼 펴낸 이 책은 ‘해전사’의 주요 편집자였던 고려대 강만길 명예교수와 최장집 교수의 논문을 직접 거론하며 ‘민족지상주의’와 ‘좌파민족주의 진영의 정치학’이라고 맹비판을 가했다. 이후 이 책은 역사학계뿐 아니라 학계 곳곳에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이 불씨를 이어받은 것이 ‘전향한 386’과 ‘안병직 사단’이 결합하면서 4월 출범한 뉴라이트재단이었다. 뉴라이트재단은 기관지인 계간 ‘시대정신’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진보지식인’이란 코너를 만들고 가을호에선 강만길 교수를 ‘민중을 저버린 민족사학자’라고 비판했다.

이어 겨울호에선 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가 직접 나서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의 분단체제론의 허점을 비판하며 통일보다는 남한의 선진화가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진보학계의 반박은 백낙청 교수가 첫 포문을 열었다. 백낙청 교수는 계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서 박세일(서울대), 이인호(명지대), 안병직 교수를 거명하며 짤막한 반박을 가했다. 특히 그는 2000년의 6·15 남북공동선언을 폐기하고 남한 사회의 선진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안병직 교수를 겨냥해 “한반도의 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북의 모험주의적 행동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의 선진화가 가능할까”라고 역공을 가했다.

● 논쟁의 핵심 ‘안병직 사단’

‘식민지 근대화론’ 놓고 신용하-안병직 격돌

얼핏 뉴라이트와 진보학계의 대결로만 비치는 이들 논쟁의 저류(低流)에는 좀 더 복합적 양상이 숨어 있다.

신용하(서울대) 명예교수가 3월 한국사회학회 학회지에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을 발표하며 ‘재인식’의 주요 이론적 무기인 탈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나선 것은 이와 연관된 안병직 사단의 ‘식민지근대화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최근 신용하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일본 우익의 논리가 한국으로도 수출되고 있다”며 안병직 사단을 겨냥한 비판을 가했다. 이영훈 교수가 ‘시대정신’ 겨울호에서 신용하 교수의 책에 대한 서평 형식을 빌려 “1990년대 이후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 ‘재인식’을 비판하며 출간된 ‘근대를 다시 읽는다’의 편집진 역시 안병직 사단을 겨냥하고 있다. 윤해동(성균관대) 연구교수가 주축이 된 이 책의 편집진은 ‘재인식’이 ‘해전사’의 과잉 민족주의를 비판한다면서 근대성의 또 다른 쌍생아인 국가주의에 빠져 있다고 맹공을 가했다.

백가쟁명으로 보이는 이들 논쟁의 핵심에는 서울대 경제학과 사제 간인 뉴라이트 진영의 안병직, 이영훈 교수가 포진해 있다. 1970, 80년대 좌파 이론가와 운동가로 활동했던 이들은 우파로 전향한 뒤 좌파 시절에 갈고닦은 ‘전투력’과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현실 적합성에서 우위에 선 우파의 이론을 결합해 학계의 전통적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일종의 ‘일대일 결투’를 신청하고 있는 셈이다.

안병직 교수가 창설하고 이영훈 교수가 소장 직을 물려받은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학계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연구소다. 한국학계가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1970년대 이후 줄기차게 주창한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해 온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산실이 바로 이 연구소였기 때문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통해 한국이 근대화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한국 산업화의 결정적 변수로서 박정희의 역할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이어진다.

● 진보학계 내부 노선투쟁

‘평화냐 통일이냐’ 최장집-백낙청 논리 대결

여기에 진보의 전유물이었던 통일담론이 북핵 위기로 잠식되고 노무현 정부의 무능이 뚜렷하게 부각되면서 진보 진영의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는 점도 ‘노선투쟁’ 형식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낙청 교수가 5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라는 저서를 발표하며 같은 진보학계에 속한 최장집 교수를 실명 비판하고 나선 것이 대표적 예이다. 백낙청 교수는 ‘남북 문제에서 통일보다 평화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거나 ‘민주화 이후 오히려 민주주의가 퇴보했다’고 최장집 교수가 노무현 정부를 비판한 것에 논쟁적 반론을 제기했다.

백낙청 교수는 ‘평화우선론’에 대해선 “분단체제를 간과한 채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나 적용될 수 있는 주장”이라고 반박했고, ‘민주주의 위기론’에 대해선 “민주화 세력의 집권으로 대한민국이 망가졌다는 보수 세력의 결론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를 1980년대 운동권의 민족해방(NL)계와 민중민주(PD)계의 노선 대결에 비견하며 건설적 부활을 제창했다.

다른 한편으론 한국 지식사회의 ‘마지막 성역’으로 남아 있던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학자들에 대한 일종의 우상 파괴 현상이 맞물리면서 ‘논쟁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젖힌 측면도 있다.

중견 철학자인 윤평중(한신대) 교수의 잇따른 ‘백낙청 비판’과 ‘리영희 비판’은 이런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윤평중 교수는 5월 “정통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앞선 남과 그렇지 못한 북을 부당하게 등질화하고 있다”고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을 비판했고, 이번 달에는 리영희(한양대) 명예교수를 겨냥해 “북한맹(北韓盲)과 시장맹(市場盲)이라는 치명적 오류에 빠져 지식인으로서의 엄격성과 학자로서의 객관성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현재 학계의 논쟁에는 다양한 요소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논쟁의 불씨들이 쉬 사그라지기보다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지현(한양대) 교수는 “내년 대선국면에서도 이들 논쟁이 지속될 수 있느냐야말로 거꾸로 이들 논쟁의 진정성을 시험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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