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 이념 과잉에 생산성 상실 ‘불임 학문’으로

  • 입력 2006년 9월 1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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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논리 확산 막아야”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이 15일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인문학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선언문은 시장논리의 무차별적 확산으로 위기에 처한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사진 제공 고려대
“시장논리 확산 막아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이 15일 고려대 100주년기념관에서 ‘인문학 선언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선언문은 시장논리의 무차별적 확산으로 위기에 처한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했다. 사진 제공 고려대
《인문·사회학이 고사(枯死)하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인문·사회학은 ‘경쟁의 시대’에 도태된 ‘낙오자’요, 생산성이 담보되지 않는 ‘불임(不姙)의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인문학 교수들은 아우성이고, 학부모는 자식의 진학을 만류하며, 재학생들은 생존을 위해 ‘전향(轉向)’을 모색한다. 위기의 근인(根因)은 무엇인가. 세계화시대의 시장논리(외인론·外因論)인가, 학문의 자기개혁 실패(내인론·內因論)인가. 인문·사회과학 교육을 책임진 교수들에게 원인과 길을 물었다. 》

○ 연구, 교육, 평가의 ‘3박자’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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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연구, 교육, 평가라는 우리 학계 3가지 핵심 역할에 대해 비판이 고르게 쏟아졌다는 점이다. 교육 시스템 문제를 비판한 ‘교육의 문제점’(20.3%)이 단일 항목으로는 가장 많았지만 학문의 후진성과 폐쇄성을 ‘연구의 문제점’(27.2%)으로 묶고 공정한 평가 시스템 부족과 단기성과주의를 비판한 항목을 ‘평가의 문제점’(22.1%)으로 묶었을 때 그 비율도 각기 높게 나타났다. 인문·사회학계의 위기가 지엽적이 아니라 총체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특히 ‘항목 선정의 이유를 기술해 달라’는 주관식 문항에서 연구 분야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답변이 많았다. 여기에는 ‘학문의 식민지화’에 대한 비판이 두드러졌다. 부산대 김기혁(지리교육) 교수는 “현재 인문사회학의 위기는 광복 이후 외국, 특히 미국 이론의 편식과 민주화 욕구에 따른 급진적 사회과학의 도입으로 과잉 이념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정인(정치학) 서강대 교수는 “한국과 같은 경제적 위상을 갖춘 나라에서 인문사회 분야의 대외 의존성이 그렇게 높은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 고질적 패거리 문화의 해악

우리 학계의 고질적인 패거리 문화에 대한 질타도 만만치 않았다. △이념과 끼리끼리 문화로 인한 학문 공동체의 분열과 △출신 학교와 스승에 따른 학내 정치의 과잉 등 패거리 문화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한 비율이 13.3%에 이른다.

경북대 노진철(사회학) 교수는 “끼리끼리 문화의 단면인 인용이 인용을 낳는 현상은 어떤 논제에 대해 일단 회의와 부정으로 시작해야 할 인문사회 연구의 기본 속성을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이남인(철학) 서울대 교수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폐쇄적 학문문화가 한국적 특수성만 강조함으로써 세계적 보편성을 갖춘 이론 창출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결국 패거리 문화가 낳은 배타성이 한편으로 서구 이론을 추종하는 후진성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폐쇄성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인문학의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지적이다. 이는 또한 정실주의를 낳고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해친다는 점에서도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우리 학계의 고질병이라는 비판을 낳고 있다.

이는 서울대 출신의 학문공동체 지배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서울대를 포함한 국·공립대의 폐지(7.9%)를 최우선의 위기 타개 안으로 제시하는 응답자들의 비판의식도 이 지점에 맞닿아 있다.

○ 인문학 위기, 외생 변수와 내생 변수

최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인문학 선언’을 발표하면서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지적했다. 첫째는 무차별적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 이로 인한 대학의 상업화라는 외생적 요소였고, 둘째는 인문학자들이 이에 대응해 인문학의 체질 개선에 적극적이지 못했다는 자기반성이었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시장논리 지배현상’과 ‘단기 연구 성과 우선평가’라는 외부적 요소를 비판하는 목소리(27.8%)보다는 연구 역량의 부족과 패거리 문화 등 내부적 문제점(40.5%)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위기 타개책도 응답자가 가장 많았던 ‘대학원생에 대한 국가 지원 확대 및 연구비 지원의 투명성 확보’를 제외하면 △자생적 이론의 개발 △논문 개혁 △교수 평가의 질적 차별화 등 내부 개혁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학술진흥재단 인문학단장을 맡고 있는 조성택(철학) 고려대 교수는 이에 대해 “문제의 원인을 시장논리의 결과로 보는 것과 시장주의의 결과로 보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현재 인문·사회과학 학과 지원자가 줄어드는 것은 공급 과잉 현상에 의해 초래됐다고 보는 것이 시장논리라면 이를 그대로 시장의 논리에 맡겨 둬야 한다는 시각이 시장주의”라며 “시장의 논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시장주의에 맞서서 최소한의 인문학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인문학 선언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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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학계의 현실참여 지나치다” 54%▼

인문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인문학의 위기’라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었다.

신라대 정상모(철학)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데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면서 “현재 우리 학계는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의 시기일 뿐”이라며 ‘소수 의견’을 개진했다. 정 교수는 “지금 우리 학계는 유사 이래 국제 수준에 가장 근접해 있고 자생적 발전의 기틀이 이미 마련됐다고 생각한다”며 “학계가 시장경쟁원리 속에 편입되고 있다는 것이 가장 좋은 증거”라고 말했다.

인문학의 위기 타개책에 대해서도 대다수 학자가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요구한 반면 일부 학자는 신중한 대응을 주문하기도 했다. 강원대 신중섭(서양철학) 교수는 “지금으로서는 어떤 제도도 한계가 있다”며 “외부적인 자극도 필요하지만 내부적인 성찰과 반성이 더 절실한 만큼 시간을 갖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관망론’을 내놓았다.

학자들의 현실참여 문제에 대해서는 ‘학계의 현실참여는 자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현실참여에 대해 ‘과도하다’(54.2%)가 ‘부족하다’(33.7%)를 압도했다. 현실참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정부 및 각종 위원회의 지식인 참여가 급증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풀이된다. 반면 ‘권력 비판’에 대해서는 ‘부족하다’(38.6%)는 의견이 ‘과도하다’(28.9%)는 견해를 앞질렀다.

한편 권력비판에 기타 의견(32.5%)이 현실참여에 대한 기타 의견(12.1%)을 제시한 경우보다 월등히 많아 권력 비판 여부를 둘러싼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청주대 이명자(유럽어문학부) 교수는 “권력 비판은 필요하지만 대안이 너무 빈약하고, 현실참여가 많았지만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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