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세월앞에 소신도 녹스는가

  • 입력 2006년 9월 1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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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이 사법부 독립을 지키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헌법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헌법재판소장 임명 강행을 주장하니, 정말 아이러니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임명 동의 과정을 둘러싼 위헌·위법 논란과 관련해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12일 ‘옛날얘기’를 꺼냈다. 1988년 6월 노태우 정부 들어 첫 대법원장 임명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판사와 사법연수원생들의 집단 항명 파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랬던 그들’이…

노 전 대통령이 김용철 대법원장을 재지명하려 하자 전체 법관의 절반인 430여 명의 판사가 ‘민주화 시대에 맞지 않는 인사’라는 이유로 집단 반대 성명을 냈고 김 전 대법원장은 스스로 사퇴했다.

노 전 대통령이 새로이 정기승 대법관을 후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으나 이번에는 사법연수원생까지 나섰다. 연수원 18기(사법시험 28회)가 반대 서명을 주도하고 19기가 가세했다.

당시 19기 연수원생자치회 총무로 서명운동에 동참했던 주 의원에 따르면 현재 노무현 대통령의 뜻을 받아 전 후보자의 헌재 소장 지명 과정을 실무 총괄하고 있는 전해철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과 김진국 법무비서관 등이 19기 동기생들의 서명운동을 주도했다는 것.

국회 인사청문특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으로 전 후보자 지명을 옹호하고 있는 열린우리당 최재천(연수원 19기) 정성호 문병호(이상 18기) 의원도 서명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주 의원은 기억했다.

사법연수원생들의 시국 관련 집단행동은 사상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 ‘정 대법원장’에 반대했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당시 서명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당시 정 대법관이 정권과 가까운 사람이라서 안 된다는 등의 얘기가 많았다”는 정도로 기억할 뿐이다.

사법연수원생들의 ‘궐기’는 승리했다.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여소야대의 국회가 부결시켜 버린 것. 이 또한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연수원생들은 “사법부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며 자축했다고 한다.

■‘속모를 그들’로…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2006년 8월 16일, 이제는 청와대 실세가 된 전해철 수석은 전효숙 헌재 재판관에게 전화를 걸어 헌재 소장 지명 사실을 알리며 임기와 관련해 헌재 재판관직 사직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전 재판관은 이 전화에 따라 사직서를 냈다. 전 수석은 또 헌재 소장의 임기 문제와 관련해 대법원장 비서실장에게도 전화해 ‘상의’했다.

전 수석의 그런 행동 자체가 사법부의 독립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사법연수원 동기(7기·사법시험 17회)인 전 후보자를 임기 6년의 헌재 소장으로 임명하기 위해 헌재 재판관직을 중도 사퇴시키는 ‘편법’을 쓴 것도 ‘권력의 사법부 장악 의도’라는 의심을 살 일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도 많다.

18년 전 ‘정권과 가까운 사람’이라는 의심으로 대법원장 임명 반대를 외쳤던 전 수석이 지금은 그런 의심을 자초하는 중심부에 서 있는 셈이다.

전 수석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며 “사법연수원 동기들에게나 물어보라”고 말했다.

최재천 의원은 전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상정될 예정이었던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의 적법성을 둘러싸고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과 법리 공방을 벌이며 “전 후보자의 임명동의 절차에 문제가 없는 만큼 동의안을 표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의원은 12일 본보와의 전화통화에서 “1988년 정 대법원장 지명 반대 서명운동을 벌인 데 대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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