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하나씩 주고받기… 어정쩡 타협

  • 입력 2006년 9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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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관계 법·제도선진화방안’이 11일 극적으로 노사정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날 회의장에는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아 ‘불씨를 안은 타결’이 됐다. 왼쪽부터 손경식 대한상의회장, 이수영 경총회장, 조성준 노사정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이상수 노동부 장관. 박영대 기자
노사관계 법·제도선진화방안’이 11일 극적으로 노사정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이날 회의장에는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아 ‘불씨를 안은 타결’이 됐다. 왼쪽부터 손경식 대한상의회장, 이수영 경총회장, 조성준 노사정위원장, 이용득 한국노총위원장, 이상수 노동부 장관. 박영대 기자
노사정이 11일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 노사관계 로드맵의 핵심 쟁점을 3년 유예하기로 한 것은 3자가 모두 최소한의 실리를 챙기자는 판단에 따른 결과다.

노조 전임자의 임금 지급이 금지되면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노조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노동계는 존립을 건 강경 투쟁을 예고했다.

또 노동계가 도입을 원했던 복수노조제는 경영계가 기피하는 사항이어서 노사 양측이 하나씩 주고받으며 유예안을 마련한 셈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로드맵 취지는 크게 퇴색했다. 1997년부터 미뤄온 사안에 대해 진전된 내용을 전혀 담지 않은 채 또다시 3년 유예하는 것은 반쪽짜리 개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노사정, “파국은 피하자”=노사정은 8월 말까지 노조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복수노조제 등 핵심 쟁점에 묶여 로드맵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결국 한국노총의 ‘무조건 3년 유예’안을 정부가 전격 수용하면서 이번 공방은 사실상 정부의 대폭 양보로 끝났다.

노동부는 당초 3년 유예를 하려면 노조 규모별 전임자 수 제한 등 다른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미루더라도 3년 후에는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를 시행할 수 있도록 미리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부는 진전된 내용을 추가하지 못한 채 시행 시기를 미루는 데 그쳤다.

이번 합의로 한국노총과 경영계는 3년 유예라는 실리를 얻었지만 정부는 개혁이라는 명분을 잃게 됐다. 정부가 파국은 막았지만 중심을 잃고 노동계에 끌려 다녔다는 비판도 나온다.

▽핵심 쟁점 유예, 직권중재 폐지=노사정은 핵심 쟁점을 3년 유예하기로 하는 대신 이에 대한 보완책을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우선 노동조합이 전임자 급여를 스스로 부담할 수 있도록 재정자립 방안을 노사정위에서 집중 논의하기로 했다.

또 복수노조제 도입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정부가 추진해온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도 포함돼 있다.

노사정은 또 병원의 응급실 등 파업 때에도 업무 유지가 필요한 부서에서는 파업을 금지하고, 파업으로 부족한 인력을 외부에서 데려다 쓸 수 있도록 했다. 필수공익사업장 범위도 병원, 전기, 수도, 가스, 철도, 석유, 한국은행 등에서 항공, 증기·온수공급, 폐수·하수처리업 등으로 확대된다.

부당해고와 관련해 지금은 노동위원회가 부당해고 판정을 내리면 반드시 원직에 복직을 시켜줘야 하지만 앞으로는 근로자가 원한다면 금전으로 보상할 수도 있다.

▽반쪽 개혁에 불씨는 여전=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는 전임자가 지나치게 많은 한국의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추진됐다. 그러나 현실에 타협하는 데 그쳐 차기 정권의 과제로 남게 됐다. 국제노동기준에 맞춘다며 추진했던 복수노조제도 노사의 ‘주고받기’ 타협으로 미뤄졌다.

이번 협상에는 민주노총이 불참해 노사정간 갈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이날 노사정 합의가 이뤄지자 ‘밀실 야합’이라며 10월 말 총파업 등 강경 투쟁을 예고했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나타냈다. 한국노총은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저지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민주노총은 필수공익사업장의 대체근로 반대와 복수노조 도입을 주장했다.

이번 합의안은 민주노총에 비해 한국노총의 입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하고 있어 민주노총의 반발을 초래했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회의장 나오던 한국노총 위원장

민노총 일부 조합원에 폭행당해▼

11일 전격 합의된 노사관계 법·제도 선진화방안(로드맵)에 대해 노사정 각 주체들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어 순탄치 않은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노사정의 타협 정신과 실질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정부가 대승적 양보를 했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3년 유예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의 시행 시기 못지않게 실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미리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경영계는 무엇보다 복수노조 허용이 유예된 것에 안도하는 모습이다.

이날 한국경영자총협회는 “노사정이 쟁점 사안에 대해 시간을 두고 합리적 대안을 만들기로 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경영계의 한 관계자는 “강성 노조를 둔 기업들은 노조 전임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임금 지급 금지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유예가 결정돼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잇달아 수정안을 내놓으며 사실상 이번 합의를 주도한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은 “현실적으로 당장 시행할 수 없는 쟁점들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노동계의 반발을 의식한 소회를 밝혔다.

반면에 이번 합의를 ‘반(反)노동 폭거’로 규정한 민주노총은 “10월 말 또는 11월 중순 예정대로 총파업을 통해 노사정 합의를 무력화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이번 합의에 강하게 반발했다.

한편 이날 민노총 조합원 일부는 노사정의 합의가 이루어진 회의장에 진입하려다가 경찰과 충돌을 빚었으며, 발표를 마치고 퇴장하던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을 폭행해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은우 기자 libra@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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