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즐거운 강의, 눈물의 학점

  • 입력 2006년 7월 7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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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몸담은 지 어느덧 사반세기를 넘어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서 기쁘게 한 일보다는 떠밀려 마지못해 한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내가 좋아하는 새로운 교과목을 신설해 남은 기간에 즐겁게 강의해 보자는 거였다.

그리하여 전공인 역사에 소녀 시절부터 꿈꾸던 문학을 접목하여 ‘역사와 역사소설’이라는 강의를 개설했다. 현대의 장편 역사소설을 주제의 시간 순서에 따라 선정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부터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까지 문학성을 평가받은 작품은 물론 대중적인 작품도 넣었다. 다만 동일한 작가의 작품은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하였다.

3학점짜리 강의로 일주일에 75분의 강의를 두 번 하기로 했다. 그래서 첫 시간에는 스토리텔링을 하도록 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구별해 보고 역사적 개연성 등에 대한 종합토론을 하도록 했다. 스토리텔링은 학생들이 상황극을 통해 표현해도 좋다고 하였다.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연극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극적인 장면을 골라 연극을 하는데 마분지로 만든 왕관을 비롯하여 사약, 이름표 등 소도구를 구비하여 실감나게 연기해 강의 시간마다 요절 복통할 일이 생겼다. 어떤 시간에는 너무 웃어 입아귀가 아픈가 하면 강의 시간 내내 웃다가 끝날 때도 있었다.

‘방각본 살인사건’ 강의 시간이었다. 이 소설은 역사 추리소설로 18세기 정조 때 백탑파(북학파)의 활약상을 부각하면서 방각본 소설(조선시대 민간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간행한 소설)과 관련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시간에 발표를 맡은 학생들이 나에게 카메오(단역으로 출연하는 유명인)로 출연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지막에 범인인 청운병이 잡혀 처형되는 장면에서 그의 어머니인 노파 역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응하였다. 학생들이 원래 각본에서 요구한 내 대사는 “안 된다”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더해 죄인을 함부로 대하는 형리들에게 “이놈들아! 내 아들 그냥 좀 놔둬” 하고 소리 지르고 처형할 때는 “아니 된다” 하고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얼마나 열연(?)을 하였는지 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교수님 정말 우신다”며 야단법석이었다. 얼마를 통곡하다가 슬그머니 머리를 들고 웃었더니 학생들은 재미있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즐거운 강의는 내 교수생활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이 지나가자 고통의 시간이 왔다. 드디어 종강이 되고 성적을 처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의 변별력이 크지 않다는 데 있었다. 결석도 지각도 안 한 학생이 3분의 2를 넘고 발표도 모두 열심히 했을 뿐만 아니라 숙제나 리포트를 잘 써 낸 학생이 대부분이어서 C학점 이하인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다.

그런데 제도적으로는 C학점 이하의 점수를 수강생의 30%에게 주어야 성적이 처리되는 난관에 봉착하였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B-’인 학생 중에서 ‘C’로 떨어뜨리는 작업을 하였다. 말하자면 트집 잡기였다. 억지로 깎아내리려니 고통스럽고 얼굴까지 아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보고 확인한 끝에 성적 공개를 단행(?)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왜 C를 받아야 하느냐?”는 항의가 빗발쳤다. 어떤 학생은 연구실에까지 찾아왔다. 나는 성적처리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돌아서는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찢어졌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평가를 받아 시험 점수를 받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 어려서만 해도 숙제를 해 가면 선생님은 빨간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 주곤 했다. 아이들끼리 공책을 펴 놓고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어떻든 선생님이 강제로 점수를 깎는 일은 없었다.

현재 학점제도는 대학을 지탱하는 중요한 제도이긴 하지만 같은 과목 수강생 중 억지로 30%를 C학점 이하로 떨어뜨려야 한다는 규정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학입시에도 여러 가지 융통성을 도입하면서 학점제도는 한 치의 여유도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앞으로 이 강의를 두 학기만 더 하면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학생들과의 즐거운 추억 만들기를 위해 개설한 교과목이 벌써 나의 사슬이 되어 버렸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강의의 기쁨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성적 처리의 슬픔이 벌써부터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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