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떼 소송꾼’ 블랙리스트 만든다

  • 입력 2006년 5월 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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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전도유망한 50대 남성이 바다에 빠져 죽은 만큼 국가가 2000억 원을 배상하라.”

7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정모(여) 씨. 그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과 행정법원의 이곳저곳을 드나든다.

법정은 물론 법원장실도 안방처럼 출입하며 이같이 외친다. 그가 언제부터 법원을 드나들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거의 하루에 한 번꼴로 정 씨가 법원에 낸 소송 가운데 계류 중인 것만 줄잡아 70여 건. 인지대는 늘 100원이다. 소장 요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법원은 사건번호를 부여한다. 막무가내식 소란을 우려한 때문이다. 정 씨가 낸 소송은 곧바로 ‘각하’ 된다.

법원과 검찰청사가 모여 있는 서초동에는 정 씨와 같은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부터 나타난 이른바 ‘태극기 할머니’는 온몸에 태극기를 휘감고 가슴 속에 미국 성조기를 품은 채 법원을 배회한다. 이 할머니는 최근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뛰어들기도 했다. 법정에서는 검사의 목을 뒤에서 조르기도 하고 이를 말리는 판사의 법복을 찢어 감치 명령을 받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 2층 로비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욕을 퍼붓는 중년 여성도 있다. 이 아주머니는 법원이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들어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올해 92세인 우모 씨는 3년째 서초동을 찾고 있다. 자신이 운영하던 중소기업을 통째로 뺏기고 재판에서 졌다. 노숙자 생활을 하는 우 씨는 두툼한 재판 기록을 안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의 형사고소 사건 수는 인구 비례로 따질 때 일본의 155배다. 지난해에만 80만 명가량이 검찰에 고소 고발을 당했다. 이 가운데 80%가량은 무혐의 처리됐다.

법원에 내는 민사소송과 행정소송 건수도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연간 법원에 접수된 민·형사 사건은 500만 건이 넘었다. ‘동방소송(訴訟)지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이런 고소나 소송 가운데 태반이 ‘억지’에 가깝다는 점이다. 소송을 낸 사람은 억울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법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경우가 많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법원은 이 같은 ‘악성’ 민원인과 정상적인 민원인을 구분하기 위해 최근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상습적인 ‘소송꾼’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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