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두뇌 활용 제도 없어 학교 떠나면 ‘연구도 정년’

  • 입력 2006년 3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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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정년퇴임한 전 서울대 인문대 교수 진모(69) 씨는 퇴임 이후에도 평생 연구해 온 윤리철학 분야 논문을 쓰고 있지만 학술지에 논문을 싣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연구비 지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논문 게재비 20만∼30만 원이 부담스러워 논문게재를 미루고 있다”면서 “정년퇴임한 교수들은 해외 학회에서 초청을 받더라도 여비가 부족해 대부분 참석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진 씨처럼 왕성히 활동할 의욕과 능력이 있는 정년퇴임 교수들이 사실상 ‘사장’되고 있다. 이들은 연구비 등 현실적인 문제로 연구 활동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는 고급 두뇌 인력에 대한 실질적인 활용 방안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년퇴임은 학자의 정년’=30년가량 강단에 섰던 정년퇴임 교수들은 한 달에 300만 원 안팎의 연금을 받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이들이 은퇴한 뒤 연구 활동을 하려고 하면 여러 가지 장애에 부닥치게 된다. 우선 연구실 등 공간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고, 연구에 필요한 자료 등을 모으는 데도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

이 때문에 정년퇴임 교수들은 연구활동을 시도하더라도 곧 포기하거나 정년이 없는 외국으로 떠나기도 한다.

한 정년퇴임 교수는 “연금 가운데 매달 100만 원을 떼어 오피스텔을 연구실로 사용했는데 연구활동으로 인한 소득도 없이 돈만 쓰기가 가족들에게 미안해 지금은 집에서 책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정년퇴임한 전 고려대 문과대 정광(鄭光) 교수는 “몇 달 전 일본의 한 대학과 계약해서 4월 초 일본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역시 올해 정년퇴임한 전 고려대 문과대 신승하(辛勝夏) 교수는 “인문학적 지식은 나이가 들수록 축적되기 마련인데 정년퇴임을 하면 학자로서도 정년을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체계적 지원 시스템 없어=현재 대학이나 학술단체 가운데 정년퇴직 교수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갖춘 곳은 사실상 전무하다. 일부 대학이 일정한 조건을 갖춘 명예교수들에게 한 강좌를 맡게 한다든지 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이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학술진흥재단의 한 관계자는 “현역 연구자들을 위한 지원도 벅찬 상태에서 퇴직 교수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다”며 “퇴직 교수들이 현직 교수들과 함께 공동연구원 등으로 참여하는 길은 열려 있으나 이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퇴직 교수들은 “가끔 퇴직 교수들이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후배들과 연구비를 놓고 경쟁하는 것을 꺼려 실제 연구에 참여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대학들도 정년퇴임한 교수들에게 강의나 연구비를 주는 것이 쉽지 않다.

서울대 교무처의 한 관계자는 “정년퇴임 교수들을 활용할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한정된 자리를 순환시킬 필요가 있는 학교 입장에서는 제도적인 시스템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전 이화여대 시각디자인학과 김영기(金永起) 교수는 “학계나 정부, 언론기관 등에서 퇴직자들의 자원을 데이터베이스화해 필요에 따라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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