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 反인권 범죄 소멸시효 인정 못한다”

  • 입력 2006년 2월 1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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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다 숨진 최종길(崔鍾吉) 전 서울대 법대 교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소멸시효’ 완성을 이유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민법상 ‘신의칙(信義則·신의성실의 원칙)’에 위배될 경우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민사5부(부장판사 조용호·趙龍鎬)는 14일 최 전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국가는 최 교수 유족에게 18억48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원칙적으로 이 사건에서 유족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시효가 완성돼 소멸됐지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유족이 사건의 진실을 알지 못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었으므로 그 기간에 시효가 완성됐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중앙정보부와 같은 거대 국가조직이 서류를 조작하는 방법으로 조직적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오히려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사건에서 국가가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한다”고 밝혔다.

▽‘신의칙’ 판결=재판부는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기 위해 신의칙의 법리를 적용했다. 신의칙이란 서로 상대방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성실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민법 원칙.

보통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인권침해 사건에서 국가는 형식적으로 소멸시효가 완성됐더라도 신의칙상 피해자에 대한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를 지므로 국가가 신의를 배신한 이상 책임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설명.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은 지난해 대법원장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국가권력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이라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다른 의문사 사건 배상 길 열려=이번 판결로 국가가 저지른 반인권 범죄 피해자들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간첩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21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은 함주명(咸柱明) 씨가 대표적 사례. 국가와 고문기술자 이근안(李根安) 씨를 상대로 낸 38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현재 1심에서 진행 중이다.

법원 판결 후 최 전 교수 유족과 국가 모두 상고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 소멸시효를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을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다른 사건에 최 전 교수 판결의 법리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이번 판결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건에 대해 구속력을 갖지는 못하지만 선례로 작용할 수는 있다.

한편 재판부는 ‘최 교수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며 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최 전 교수 유족의 명예를 훼손한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 차모 씨에 대해 1심대로 2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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