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성희]세계지도 놓고 학교 고르는 엄마들

  • 입력 2005년 8월 17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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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지인이 초등학교 아이들을 조기 유학시키기로 ‘결심’했다.

조기유학의 결정, 유학 대상 국가 및 학교의 선정, 비용과 절차를 따져 보는 과정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었던 필자는 하루하루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놀라움은 너무나 많은 아이가 유학을 간다는 점이었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서만 한국을 떠난 초중고교생이 5928명이다. 전년도의 4427명에 비해 33.9%가 늘어난 것이다. 부모의 이주로 인한 유학까지 합치면 1만2317명이나 된다. 전국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학생이 떠나는지 궁금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통계가 없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올해 학부모 36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4.4%가 “여건만 되면 자녀를 조기유학 보내고 싶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잠재적 수요도 엄청난 것 같다.

서울 강남지역의 초중학교에서는 방학이 끝나고 개학 때만 되면 빈자리가 무더기로 생긴다. 방학 중 유학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학정보 제공과 컨설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인재와 국부의 유출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둘째, 유학 대상 국가의 다양함에 놀랐다.

학부모들은 좀 더 나은 교육환경을 찾아 문자 그대로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고 있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전통적으로 선호되는 국가이다. 최근 신흥 지역으로 떠오른 것이 중국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이다.

말레이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주재원의 부인으로 아이를 그곳 학교에 보내고 있는 A 씨는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쿠알라룸푸르에만 여러 곳의 인터내셔널스쿨이 있는데 학생의 30% 이상이 한국인이다. 넘치는 한국 학생 때문에 고민하던 이곳 학교들이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고용허가를 얻은 주재원 자녀 외에는 한국 학생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전해 왔다.

그렇다고 물러설 대한민국 엄마들이 아니다. 신대륙을 발견하는 콜럼버스처럼, 수출전사처럼 엄마들은 인도는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학교를 ‘개척’하고 있었다.

셋째, 사실 이 점이 가장 놀라운데 교육문제에 있어 엄마의 강력한 주도권이다.

자녀의 교육을 엄마가 총지휘하는 한국적 교육현실에서 돈벌이에 바쁜 아빠들이 자녀의 교육문제에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어 보였다.

“애들을 위해 외국에 나가서 고생하겠다는데 그것도 이해 못하면 이혼해야죠.”

원치 않는 기러기 아빠들이 양산되는 까닭이 납득되었다.

그렇다고 엄마들이 남편의 돈만 갖다 쓰는 것은 아니다. 비자를 받기 위해 공부해서 스스로 유학생 신분이 되는가 하면, 외국에 나가서도 아이들을 위해 과외 팀을 짜 준다.

세계지도를 펴 놓고 자녀의 교육을 설계하고 있는 엄마들에게 철지난 애국심은 먹히지 않는다. 그런 엄마들을 주저앉히는 방법은 경쟁력과 비전을 두루 갖춘 교육 여건을 제공하는 것밖에 없다. 좋은 교육을 시키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 때문에 인재가 빠져나가고, 국부가 유출되며 가정이 파괴되고 있는데 조기유학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유학생 통계조차 못 내놓는 교육당국이 한심하기만 하다.

정성희 교육생활부장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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