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 개통 1년]<上>생활패턴의 변화

  • 입력 2005년 3월 23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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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로 고속철(KTX)이 개통된 지 1년. 시속 300km로 서울∼부산을 2시간 40분에 주파하는 KTX는 전국을 3시간대 생활권으로 바꿔놓았다. ‘길이 뚫리면 사람도 변한다’는 말 그대로 국민의 일상생활과 경제활동 양상은 고속열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KTX가 몰고 온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장을 3회에 걸쳐 들여다본다.》

23일 오후 7시 반경 서울역사 내 개표구 앞. 부산과 동대구 등에서 출발한 KTX가 속속 도착하면서 수많은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당일 출장을 다녀오는 샐러리맨, 부산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여행객….

전국 대부분 지역이 당일치기 여행권에 들어오면서 상당수 기업은 1박2일 출장제도를 아예 없애 버렸다. 국내 출장은 웬만하면 당일 출장으로 처리하는 것. KTX 요금을 지원하는 것이 숙박비와 식대를 지급하는 것보다 경비가 덜 들기 때문이다.

당일 코스 여행도 급증하고 있다.

부산시내를 구경하는 ‘시티투어’는 요즘 월 30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인기 상품이 됐다.

이날 오후 10시경 서울역에서 만난 재미교포 조봉란(73·여·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거주) 씨는 “오전 8시에 서울역을 출발했는데 벌써 돌아왔다”며 “해운대 광안리 태종대 등 부산의 명소를 둘러보고 자갈치시장에서 해물을 먹은 뒤 동래온천에서 휴식을 취했는데도 시간이 남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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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자영업을 하는 정재룡(44·달서구 송현동)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휴일이면 애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고궁과 미술관, 인사동거리 등을 돌아다닌다”며 “지방과 서울의 경계가 없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KTX 역사 부근의 백화점들에는 다른 지방 손님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서울역 내 L마트는 최근 매출이 30% 가까이 상승했고 이중 5%가 지방 손님이다. KTX로 출퇴근하거나 여행하는 사람들이 생필품을 많이 구입한다는 것.

서울 중구 소공동 L백화점은 KTX 개통 이후 천안시 등 충남지역 고객이 15% 이상 늘어난 것으로 분석했다.

부산 H백화점 관계자는 “아직 부산은 매출에 큰 차이가 없다”며 “그러나 기존 고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대부분 백화점과 면세점 등이 명품관을 새로 단장하는 등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유명 병원을 찾아 상경하는 환자가 늘면서 지방의 병원들은 비상이 걸렸다.

최근 서울 S병원에서 정밀건강진단을 받은 박성호(59·사업·대구 동구 신천동) 씨는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제대로 된 의료기관에서 건강진단을 받고 싶어 쉽게 서울행을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대구지역 의료계 관계자는 “KTX 개통 이후 월평균 300∼400명의 환자가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원정진료를 받는 것으로 본다”며 “이에 대응해 지방 의료기관들도 고가 장비를 들여오고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병원도 이제 전국을 무대로 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든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대구=정용균 기자 cavatina@donga.com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고속철 덕에 주말부부 면했어요”▼

고속철 개통 덕분에 ‘주말 부부’에서 벗어난 박용수 씨 가족이 집 앞 놀이터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 제공 철도공사
“고속철 덕분에 주말부부를 탈출했어요.”

박용수(40·통상행정학부) 한국해양대 교수와 이태경(35·여·쿠시먼&웨이크필드 코리아 부장) 씨 부부는 ‘고속철 예찬론자’다.

이들은 지난해 4월까지만 해도 주말부부였다. 박 교수는 직장이 부산인 관계로 평일에는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부산 학교 근처에 보증금 1000만 원, 월세 40만 원짜리 아파트를 얻어 지내며 밤마다 귀염둥이 아들과 아내를 그리워했다. 주말에만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집에 올라왔다.

그러다 고속철이 개통된 직후인 지난해 4월말 박 교수 가족은 대전으로 이사했다.대전에서 고속철로 부부가 서울과 부산으로 각각 출퇴근하면 저녁시간을 온 가족이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박 교수는 오전 6시 반 대전역에서 고속철을 타서 1시간 50분이면 부산역에 도착한다. 택시를 타면 9시 이전에 학교에 도착한다. 강의가 끝나는 오후 5시경 부산을 출발하면 8시 이전에 대전 집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가족과 함께한다.

직장이 서울시청 부근인 부인 이 씨는 일산에서 출퇴근할 때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고속철을 타고 50분이면 서울역에 도착한다. 서울지하철 1호선으로 갈아타면 집을 떠난 지 1시간 남짓이면 직장에 닿을 수 있다.

박 교수는 “고속철, 택시비 등 월 교통비가 50만∼60만 원 들지만 부산에서 월세 생활하면서 지출했던 비용보다 훨씬 적은 편”이라며 “요즘 서울에서 출퇴근하겠다는 교수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씨도 “서울 인근의 신도시에 사는 느낌”이라며 “무엇보다도 남편이 일곱 살 된 아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행복하다”고 말했다.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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