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노년이 행복하다]<6·끝>한국 근로현장의 노인들

  • 입력 2005년 1월 17일 1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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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소방관으로 근무하다 6년 전 퇴직한 김수복 씨(60)는 요즘 소방서를 다니면서 소방관용 신발인 스파이크와 마스크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김 씨가 지난 두 달간 올린 매출은 무려 1억 원가량.

그는 “사회에 보탬이 된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회사 대표 정창무 씨(47)도 “젊은 사람들을 고용했을 때보다 매출이 훨씬 늘었다”며 “‘진작 어르신들을 고용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퇴직한 뒤 최근 안전용품 판매업체에 재취업해 큰 성과를 내고 있는 고령자들과 업체 대표 정창무 씨(위). 아래 왼쪽부터 명재곤(64) 김선호(65) 김대년(66) 김수복 씨(60). 유재동 기자

이처럼 한국에서도 ‘일하면서 행복한 노년’을 맞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유례없는 고령화 속도에 비춰볼 때 그 변화는 미미한 실정.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적했듯이 노인 고용에 대한 편견, 단선적인 인력 수급구조 등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

▽산적한 장애물=“고객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요?”

국내 기업들에 노인 고용에 대해 물으면 으레 돌아오는 반응이다. 선진국에서 노인들이 유니폼을 입고 계산대에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충북 청주시 가경동 ‘손향기 사업단’에서 할머니들이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여성 노인 일자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이곳에서 지난해 7월부터 65세 이상 할머니 15명이 주 12시간씩 일하고 있다. 유재동 기자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 월마트에는 ‘그리터(greeter)’라고 불리는 직책이 있다. 지역사회에 밝은 노인들이 고객들과 담소를 나누며 ‘쇼핑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

그러나 한국 월마트의 그리터는 고령자 대신 젊은 20대 여성이 맡고 있다. 월마트 관계자는 “한국에서는 노인이 문 앞에 서 있으면 고객들이 불편해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연령에 따른 위계질서와 조직문화도 고령자 고용의 장애물. 직장 상사는 나이 많은 직원에게 지시를 내리기가 어렵고, 후배가 자신의 상사가 되는 것을 못 견뎌 스스로 그만두는 고령자도 많다.

한 자동차업체 관계자는 “나이 든 사람을 젊은 사람과 붙여 놓으면 젊은 사람만 궂은일을 하게 돼 있어 기업들이 부담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대형 유통업체 관계자는 “카트를 밀고 물건 정리하는 일을 창피해하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며 “고정관념을 없애고 백지 상태에서 새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0월 노동부가 발표한 55세 이상 고령자 고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300인 이상 사업체 1554곳의 근로자 172만여 명 중 고령자 는 7만2000여 명(4.2%)에 그쳤다.

▽생산적 일자리 창출해야=‘일하는 노인’에 대한 공감대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정도(48.6%)가 노인층의 일자리 창출을 노후 대비를 위해 가장 시급한 정부정책으로 꼽았다.

문제는 이들의 일할 의사에 비해 국가가 제공하는 일자리 사정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

지성희 한국노인인력지원기관협회장은 “청소나 주차관리 등 복지 차원의 일회성 일자리 대신 노인들이 직접 이윤창출에 참여할 수 있는 ‘시장 중심의 생산적 노인 일자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촌서 가벼운 노동하는 시니어콤플렉스 추진”▼

고령자 고용에 대한 기업의 인식은 여전히 소극적인 반면 사회 곳곳에서는 ‘행복하게 일하는 노년’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이정재(李政宰·사진) 교수 연구팀은 최근 농업기반공사와 함께 농촌을 활용한 복합노인복지시설 ‘시니어 콤플렉스(Senior Complex)’ 건설을 추진 중이다.

도시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1억5000만∼2억여 원의 기금을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법인에 기탁하고 의료 및 문화시설이 갖춰진 마을에 입주한 뒤 일정 급여 및 복지 혜택을 받으며 가벼운 노동에 종사하는 것.

현재 전북 순창, 전남 곡성, 충남 서천 등 각 지방자치단체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예비조사에 착수했으며 이르면 내년 초 입주가 시작된다.

이 교수는 “노인 일자리 창출뿐 아니라 농촌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한국형’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충북 청주노인인력기관이 운영하는 ‘손향기 사업단’은 여성 노인 일자리의 대표적 사례.

평균 75세의 할머니 15명이 일주일에 3번가량 모여 머리핀 등 수예품을 제작해 직접 판매하고 한달에 20여만 원을 번다.

강신옥 관장(48)은 “상대적으로 빈곤하기 쉬운 여성 노인에게 경제적 보탬이 될 뿐 아니라 동년배와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고독감을 덜어준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사회부>

전지원 기자 podragon@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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