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직장인 생존전략 백태]“여기서 꺾일순 없는데…”

  • 입력 2004년 12월 23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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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자녀를 미국에 보내 ‘기러기 아빠’로 생활하는 대기업의 박모 부장(47)은 몇 달 전 현지에 세탁소를 차렸다. ‘경영’은 부인이 한다. 지금껏 별 탈 없이 지내던 박 부장이 느닷없이 세탁소를 연 이유는 ‘감원(減員)한파’에 따른 불안감 때문. 산업계 전반에 감원한파가 몰아치면서 40, 50대 직장인들이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4050세대’는 ‘직급 정년’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아 구조조정 리스트에 오를 가능성이 다른 연령층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실제로 지난달 전체 실업률은 10월과 같은 3.3%였지만 50대 실업자는 7만5000여 명으로 한 달 전보다는 5000여 명, 작년 같은 달보다는 1만8000여 명이나 늘었다. 작년 동기(同期) 대비 실업자 수는 31% 증가했다. 이 때문에 4050세대들은 생존을 위한 ‘슬픈 노력’을 하고 있다.》

▼“살아남자” 型 - 근무시간 연장… 틈틈이 외국어 공부▼

10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자동차에 인수된 쌍용자동차의 부장급 이상 임직원 160여 명은 요즘 거의 전원이 중국어 공부에 열심이다. 상하이차 경영진이 한국에 파견된 이후 이 회사의 공식적인 공용어는 한국어와 영어.

그런데도 임직원들이 중국어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현지 임원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안 되면 자연스레 밀려난다는 걱정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일부는 사내(社內) 중국어 회화과정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젊은 사원들과 함께 공부하기 부담스러운 사람들은 개인 교습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근무 시간을 연장해 가며 회사에 충성하는 사람도 많다.

서울 중구 남대문로 LG건설 사옥의 구내식당에서는 최근 들어 아침에도 줄을 서야 한다. 올해 초만 해도 아침에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사람은 총각 사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나이가 지긋한 임직원들도 새벽 일찍 출근해 아침식사를 구내식당에서 해결하고 있다.

LG건설 관계자는 “4050세대들이 신입사원 못지않은 근무 의욕을 과시하며 세끼를 모두 회사에서 먹는 임원이 늘었다”고 귀띔했다.

▼“살길찾자” 型 - 퇴직대비 사업준비… 재취업 상담도▼

대기업의 금융 계열사에서 전무로 일하다가 최근 명예퇴직한 이모 씨(52)는 공인중개사 학원을 차렸다.

그가 퇴직 직후 학원업계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은 직장에 있을 때부터 착실히 준비한 덕택. 이 씨는 “40, 50대 실업자가 늘수록 공인중개사 등 비교적 손쉽게 자격증을 따서 가게를 내려는 수요가 늘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설득해 함께 학원을 세웠다”고 말했다.

헤드헌터들에게 원서를 내놓는 사례도 늘었다.

잡링크 헤드헌팅팀 김은주 헤드헌터는 “40, 50대의 접수 건수가 작년보다 30%가량 늘었다”며 “재취업할 곳은 대부분 중소기업이지만 막상 중소기업들은 이들의 나이를 부담스러워해 갈 곳이 마땅치 않다”고 전했다.

▼“몸사리자” 型 - “상사 눈에 띄지말자” 안전위주 근무▼

상사나 오너의 눈에 뜨이는 것 자체가 직장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일관하는 4050세대도 적지 않다. 숙취로 업무에 차질을 빚을 것을 염려해 송년회를 과감히 생략하거나 부서 경비를 ‘알아서 깎는’ 식이다.

한 대기업에서 일하는 50대의 김모 상무는 “우리 나이에 영어공부를 하거나 자격증을 따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조용히 지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털어놨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부하 직원들의 반응은 착잡하다. 삼성물산의 한 과장은 “나이 든 상사들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감원 태풍이 조직의 생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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