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노벨상을 꿈꾸기에는…

  • 입력 2004년 10월 5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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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25%. 이 야릇한 등식은 유대인을 설명할 때 쓰인다. 이스라엘 안팎의 유대인 인구는 약 1500만명이어서 세계인구 60억명 가운데 0.25%를 차지한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자의 무려 25%가 유대인이다. ‘일당백’(1=100)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 가을, 또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즌을 맞는다. 한국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력을 쏟아 붓다시피 한 덕분에 평화상을 받아 오랜 갈증을 풀긴 했다. 하지만 제2, 제3의 노벨상 수상자가 언제 나올지는 불투명하다. 강원도 횡성의 민족사관고엔 이곳 졸업생이 노벨상을 받으면 흉상을 얹을 받침대가 12개나 마련돼 있다고 한다. 이를 언제 채울 수 있을까….

“노벨상, 알려진 것만큼은 대단한 것도 아닌데 애면글면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자연과학, 문학, 경제학 분야에서 여전히 노벨상의 권위는 엄청나다.

▼창의성 억누르는 하향평준화▼

결론부터 말하자. 현재와 같은 한국 시스템으로서는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평화상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상은 고도의 창의성을 요한다.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가 필생의 노력으로 연구한 결과가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을 때에야 상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엔 학자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필수적이다.

한국의 꿈나무들은 어떤가. 어린 시절부터 왜곡된 평등주의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상상력을 키우고 두뇌를 담금질해야 할 영재들이 지식 암기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30여년 전 대입 예비고사, 본고사 시절엔 꽤 어려운 본고사 문제를 풀기 위해 수재급 학생들도 머리를 싸맸다. 과외비를 줄인다고 본고사를 없앴지만 사교육비 부담은 오히려 늘었다. 고교 수학에서 미적분을 배우지 않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학습의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 숱한 ‘교육개혁’과 대입제도 변경은 하향평준화가 어느 바닥까지 떨어져야 멈출 것인가.

자유와 평등….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다. 둘 다 소중하지만 한국에서는 갈수록 평등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리고 있다. 고교 내신성적을 9등급으로 하자는 방안도 문제점이 많은데 한술 더 떠 5등급으로 조정하자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검인정 교과서 판매이익 공동분배의 사례도 해괴하다. 많이 파는 출판사나 실적이 나쁜 출판사나 ‘차별’ 없이 이익을 똑같이 나누었단다. ‘노나 공부하나 마찬가지’ 세상이 될 건가.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글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뛴 꼴찌 마라토너의 위대성을 강조했다. 맞다. 꼴찌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박수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전력을 쏟지 않은 사람마저 같은 대접을 받으려 하는 평등주의는 곤란하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데다 열정적으로 노력한 이가 큰 보상을 받더라도 배 아파 하지 않아야 한다.

농경사회, 산업화사회를 거쳐 지식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은 좁은 한반도에 7000만가량의 인구가 몰려 살고 있는 나라다. 부지런히 몸을 놀려 일하는 것만으로는 이 많은 인구가 풍요롭게 살 수 없다. 머리를 써서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사회로 탈바꿈해야 한다.

▼관권에 위축된 대학 자율성▼

세계은행(IBRD)은 ‘한국―지식기반경제로 옮겨가기’란 보고서에서 한국에서 지식경제가 잘 되려면 유효한 경제적,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함을 뜻한다.

한국의 지식 생태계는 지금 위기 상태다. 선두에 나서야 할 대학이 제 몫을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와 선의의 경쟁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관권(官權)과 일부 시민운동권력이 대학의 자율에 끊임없이 손을 갖다대는 데다 대학 스스로도 진검승부를 꺼리는 온정주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벨상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나 수상후보자들을 키울 수 있는 토양, 즉 ‘자유의 땅’은 실현되어야 한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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