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교과서 밖으로 나오다

  • 입력 2004년 6월 2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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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대통령 탄핵, 종교적 신념에 의한 군복무 거부 무죄 판결, 서울시와 시민단체의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소원 준비(본보 2일자 1면) 등 최근 일련의 ‘헌법적 사건’들은 대한민국 헌법이 우리 일상에서 살아 숨쉬는 제도라는 점을 뚜렷이 각인시키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헌법은 현실과 유리돼 교과서 속에나 존재하는 법조문이었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운동의 결과로 헌법재판소가 신설되면서 헌법은 국민 기본권의 최후 보루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 지상으로 내려온 헌법

3월12일 16대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 가결 이후 인터넷 블로그들은 일제히 ‘헌법 토론의 자발적 광장’으로 변모했다. 네티즌들이 신문에 기고된 헌법학자들의 칼럼을 인용해 스스로 헌법적 해석을 하며 탄핵 찬반 공방을 벌인 것. 탄핵 국면 이후 대중을 위한 헌법 관련 책들도 잇달아 출간됐다. 미국의 탄핵제도와 그 헌정사적 의미를 역사적으로 검토한 ‘탄핵, 감시권력인가 정치적 무기인가’(책세상)가 탄핵의 의미를 외국 사례를 통해 비춰본 것이라면, 전직 검사가 헌법조문을 인용해가며 실제사례를 들어 사법부의 특권의식을 비판한 ‘헌법의 풍경’(교양인)은 ‘법률가들의 성역(聖域)’의 높은 담장을 허무는 시도였다.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헌법은 살아 움직이는 소재로 떠올랐다. 2003년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거창한 제목의 코미디 영화가 등장했다. 탄핵 이후 촛불시위 현장에서는 ‘헌법 제1조’라는 민중가요가 널리 불렸다. 오늘날 영화와 민중가요 속에서 헌법 1조는 지고지순의 가치를 지닌 절대규범의 표상이 됐다.

● 헌법, 혁명을 대체한 개혁의 틀?

대구가톨릭대 법학과 신평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법고시를 공부할 때 헌법학 교과서는 200여 쪽에 불과했지만 요즘은 1000쪽이 넘는다”는 말로 헌법을 둘러싼 변화상을 설명했다. 이는 각종 위헌법률심사와 권한쟁의에 대한 헌법해석의 판례가 집적된 결과. 헌재에 접수된 심판사건은 88년 39건에서 2003년 1163건으로 30배 가까이 늘었다. 헌법소원의 내용도 노래방에서의 술 판매 허용, 경찰의 일제 음주단속, 사범대생 공립학교 교사 임용시험 때의 가산점 부여, 사법시험에서 영어시험을 토익점수로 대체하는 것 등 구체적 현실에 맞닿아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법학자들은 민주화의 결과로 최상위법인 동시에 기본법인 헌법이 제 위상을 찾아가는 것으로 평가한다. 서울대 법대 조국 교수는 “대통령 탄핵심판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정치적 분쟁이 헌법적 틀 안에서 어떤 절차와 순서, 논리를 통해 해소되는지를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줬다”며 “사회변화의 욕구가 80년대 ‘혁명’의 구호에서 최근 헌법이라는 제도적 해석과 개혁으로 수렴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분쟁을 헌법적 판단에 기대는 ‘규범만능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 향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서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오히려 헌법의 위상 약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명지대 허영 석좌교수는 “사문화됐던 헌법의 규범력이 되살아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정치적 규범력이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평가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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