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평준화의 덫

  • 입력 2004년 5월 14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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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평준화 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서울대 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고, 전교조 민주노총 등으로 구성된 범국민교육연대가 국립대 통합 선발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국립대 통합 선발은 대학별로 신입생을 뽑지 않고 일괄 선발한 뒤 본인 의사에 따라 학교 배정을 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서울대 폐지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구조의 지각변동을 내포하는 폭발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대학 평준화’론의 허구▼

서울대 정운찬 총장이 “매우 절박한 심정”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서울대 교수 전원에게 대학 구조조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나, 며칠 전 “대학 평준화는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은 이에 대한 논의가 머지않아 확대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교육당국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내부적인 논의 자체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서울대 폐지론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이들의 명분은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 타파다. 대학 서열 체제를 무너뜨려야 교육 불평등이 해소되고 사교육이 줄어든다는 논리다. 특히 서울대는 소수 권력집단의 생산소로 전락했으므로 앞으로 서울대 졸업장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립대를 국립대로 전환하는 방안도 들어 있다. 사립대를 장기적으로 국립대로 만들어 평준화의 틀 안에 넣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대적인 ‘혁명’이다.

문제는 이 방안이 허구라는 데 있다. 교육 불평등 문제의 경우 대학 가기 어려웠던 수십 년 전과 오늘날은 큰 차이가 있다. 대학 입학정원이 고교 졸업생 숫자를 웃돌면서 오히려 대학들이 학생을 붙잡기 위해 비상이다. 대학에 가고 싶어도 등록금이 없어 못 가는 사람은 현저히 줄었다.

가난한 집 자녀가 명문대에 못 가는 게 문제라면 소외계층에 대한 별도의 배려로 해결해도 될 것이다. 고교 졸업생 전원이 모두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있으면 못하는 학생도 있다. 그래서 우리 헌법은 국민의 여러 권리를 명시하면서 교육과 관련해서는 ‘능력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라고 단서를 달아 규정하고 있다.

사립대를 국립대로 전환시키겠다는 것은 서울대를 없애더라도 사립대 가운데 또 다른 일류대가 나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대학간 경쟁은 실종되고 말 것이다. 가뜩이나 부실한 게 우리 대학 경쟁력이다. 대학 평준화는 교육의 하향평준화를 더욱 확산시키고 대학은 지금의 고등학교처럼 단지 졸업장을 주는 역할에 그치게 될 것이다.

선진국들이 세계 최고의 대학을 육성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도 굳이 정반대의 길을 주장하는 것은 자멸을 부르는 것이다. 사교육비 해결이 중요하지만 사교육에 대한 부정적인 국민 정서를 이용해 무책임한 급진론을 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대학의 획일화는 대학의 자유와 가치를 부정한다. 이런 발상에는 단숨에 세상을 바꾸겠다는 ‘싹쓸이 의식’이 깃들어 있다. 지식사회의 근간이라고 일컫는 대학 전체를 이렇게 ‘실험용 쥐’처럼 생각해도 괜찮은 것인가.

▼공짜는 없다▼

어쩌면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이 문제가 일각에서 자못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비극이다. 상당수 사람들은 30년 전 이뤄진 고교 평준화가 잘못된 정책임을 시인하면서도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문제가 있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평등의식은 평준화에 관한 한 ‘후진(後進)’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라 전체가 ‘평준화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꼴이다.

여기에 대학까지 평준화했을 때 우리는 더욱 수렁에 빠질 것이다. 사회주의의 실패에서 드러났듯이 세상에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게 어디 있는가. 고교 시절 입시공부를 안 해도, 대학에 경쟁이 없어도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다는 ‘허황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게 포퓰리즘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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