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양혜우/이주노동자의 ‘사랑의 릴레이’

  • 입력 2004년 2월 11일 19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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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나는 대학에서 처음 ‘사회’와 만났다. 하지만 나는 거창한 구호가 싫었다. 서로 다른 이념을 겨냥해 비판하고 논쟁하는 일에서는 보람을 찾기 어려웠다. 비판의 대상은 항상 사회구조와 타인이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모순된 관용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사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 작은 실천이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삶이었다. 내가 이주노동자에게 베푼 작은 사랑의 불씨가 번져 또 다른 불씨를 만들고 그 불씨가 또 다른 불씨가 되어 퍼져간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하고 훈훈해질 것이라는 소박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 운동의 첫걸음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작업장에서 다친 외국인의 산재 보상을 위해 회사에 찾아갔다가 생전 처음 듣는 욕설과 함께 멱살 잡혀 끌려나오는 일이 내 젊은 날의 일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 별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나의 무기력함을 극복하는 것이 더 힘겨웠던 것 같다.

다섯 달치 임금이 밀린 상태에서 일하다가 오른손 둘째, 셋째, 넷째손가락이 잘린 네팔 친구 반자데. 다시 입사한 공장에서는 왼손가락이 프레스에 눌려 심하게 휘어지는 재해를 당하고도 산재보상은커녕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그의 병실을 찾는 것은 고통이었다. 공장 보일러가 터져 온몸에 3도 화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면서도 ‘누나’(외국인 친구들은 필자를 이렇게 부른다)를 부르다가 눈을 감았다는 방글라데시인 자키르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 온다.

몇 년 전 나와 함께 생활했던 이주노동자들이 귀국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 몇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양손을 모두 다친 뒤 네팔로 돌아간 반자데씨의 밝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30여일간의 농성을 통해 자신이 산재보험 적용을 받는 것은 물론 모든 불법체류자들이 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찾는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한달이 넘는 농성의 경험은 그의 삶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바꾼 듯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외국인들을 지원해준 한국 사람들의 따뜻함에 감동했다면서, 자신도 무언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했다. 그 뒤 그는 네팔에서 아동노동에 내몰리는 어린이들을 찾아내 부모를 설득하고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보일러 폭발로 사망한 자키르씨의 가족은 우리가 위로금으로 전달한 500만원(회사가 너무 영세해 산재보상을 받지 못했다)을 차마 쓰지 못하고, 그 돈으로 아들을 기리는 ‘자키르 후세인 학교’를 세웠다. 자키르씨의 친구들이 자원봉사로 교사 일을 맡고 있는 이 학교는 가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어린이들에게 큰 선물이 됐다.

나는 반자데씨가 만나는 가난하지만 밝게 웃는 버짐 핀 소녀의 얼굴에서, 자키르 후세인 학교의 흙벽돌 집에서 공부하는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의 큰 눈망울에서 작은 사랑의 불씨가 퍼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 젊음과 함께한 이주노동자 운동의 10년은 그렇게 보람 있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양혜우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소장

:약력:△1966년생 △아세아연합신학대 아세아학과 졸업 △성남외국인노동자의 집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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