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서지문/인문학의 슬픈 위상

  • 입력 2003년 10월 2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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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인문학의 위기’에 근자에 와서 이공계열의 위기마저 더해지고 있어 학계는 우울하다. 그런데 ‘인문학의 위기’와 ‘이공계열의 위기’는 무척 다른 뉘앙스를 지니는 것 같다. ‘이공계열’의 위기는 국가경쟁력과 국민적 생존마저 위협하는, 특단의 조치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위기로 느껴지는 데 반해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도만 관련된 위기이고 해결책도 없는 만성적 위기로 인식되는 것 같다.

▼해결책 없는 만성적 위기 ▼

기술자격증 획득자의 공무원 특채 등 이공계열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간간이 제시되고 있는 데 반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는 모두 속수무책인 것 같다. 인문학에 대한 지원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미루어지기 쉽지만 인문학에 대한 투자의 유무는 결국 그 국민의 교양수준, 국민적 가치관, 사회풍토로 확실히 가시화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고려대에는 경영대학 건물이 두 채 있는데, 초현대식의 세 번째 건물이 신축되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세계 초일류 대학들에서 가장 좋은 점만 본떠 지었는데, 최첨단 설비를 갖추고 있다. 우리 학교에는 이미 첨단 강의동이 몇 동 지어졌고 앞으로 속속 건축될 예정이다. 참으로 뿌듯하고 학생들을 위해 고맙기 그지없다.

그런데 우리 학교의 도서관은 25년 전 신축되었을 때에는 상당히 위용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구조도 불편하고 건물과 시설이 매우 낙후했다. 무엇보다도 아직 일부밖에 개가제화하지 못하고 대부분 폐가식으로 남아 있는데 그나마 서고의 수용 용량이 130%로 과포화 상태에 있다. 한편 2005년으로 다가온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해 최첨단 전자도서관이 지어지고 있는데 4000평 공간에 정보검색실과 국제화상회의실, 화상강의실, 그룹세미나실, 영상음악실 등을 넉넉히 배치하고도 매우 여유롭다. 그런데도 평당 건축비 800만원이 넘는 ‘인텔리전트 빌딩’에 책을 넣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 학교 학술정보위원회 위원 다수의 의견이다.

요즈음에는 자연과학 기술과학 분야뿐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전자저널이나 전자자료에의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사실이고 인문과학에서도 전자자료의 활용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책도 전자책으로 나오기 때문에 종이책은 얼마 있으면 폐기될 것이라는 생각은 가당치 않다.

지구상의 모든 책이 전자책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셰익스피어의 걸작을 비롯해 대개의 중요한 명작은 이미 전자 텍스트로 만들어졌지만 전자 텍스트는 어떤 인물이 등장하는 대목이라든가 어떤 용어가 사용된 빈도 같은 것을 검색하는 데 사용되고, 장편의 문학작품을 모니터에서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모니터에서 읽어도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이 생생히 살아날 수 있을까? ‘순수이성비판’을 휴대용 단말기에서 읽으면서 엄밀한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을까?

70년대 초에 미국 유학을 가서 처음 개가식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의 감격은 거의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것이었다.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서가에서 마음껏 책을 들춰보다가 두 팔에 안을 수 있을 만큼 책을 대출해 나오면서, 그 수많은 저서에 담겨 있는 세계의 비밀과 인간의 내면을 모조리 알아낼 기대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첨단’ 좋다고 종이책 버릴건가 ▼

1년 전 도서관장 보직을 맡고서 우리 학교 도서관도 전면 개가식으로 전환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했으나 종이책 도서관은 이왕 낙후했으니 이제는 전자도서관 쪽에 투자해서 다른 학교보다 앞서 가겠다는 학교의 방침에 직원들과 함께 여러 번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자료와 영상자료를 마음껏 검색할 수 있는 호화로운 공간이 있는 것은 좋지만 아무리 으리으리한 검색대 앞에서라도, 즐비한 서가 앞에서와 같이 인간의 지성에 대한 경이, 수많은 책에 담긴 지혜와 삶과 인간의 고뇌를 섭렵해보고 싶은 욕망, 그리고 보잘 것 없는 나의 지성이라도 낭비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되겠다는 숙연한 각오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학생들이 종이책과 친해지고 밥 먹듯이 책을 읽게 되어야 순경에서는 부드럽고 역경에서는 꿋꿋한 민주시민이 될 수 있을 텐데…. 인문학 경시 현장의 목격자는 괴롭다.

서지문 객원 논설위원·고려대 교수, 영문학 jimoon@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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