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청계천 복원 계기 미술계, '서울 재조명' 바람

  • 입력 2003년 8월 19일 17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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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에 가면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게 된다. 550만 원짜리 스피커에서 3000원짜리 구두까지 가격도 천차만별이고 숟가락, 진돗개, 가발, 보약 등 없는 게 없다.구경에 정신이 팔려 동행자를 잃어버리기도 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청계천 스케치를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나섰다.” 한 네티즌이 인터넷에 올린 청계천 스케치의 변(辯)이다.

회색 콘크리트에 덮인 서울 도심에 푸른 물줄기를 되살리려는 대역사 (大役事)의 현장 청계천이 요즘, 거대한 설치미술의 무대가 되고 있다. 》

철거와 복원이 진행되는 공사 현장은 사라지는 옛 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푸른 강물로 상상되는 미래의 모습은 비전과 환타지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를 화폭이나 앵글에 담기 위해 많은 화가와 사진작가들이 속속 모여 드는 것은 당연한 일.

○ 회화-사진 통해 추억과 미래 담아

추억의 서울…
일본 사진 작가 구와바라 시세이가 찍은 60년대 청계천 풍경. 30여년 전 청계천 사진 속에는 판자 조각을 잇댄 3층 목조가옥이나 개천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우리 네 가난했던 시절의 천변 풍경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회색빛의 서울…
한지에 그린 정재호 작 ‘너는 이제 가는구나’(2003). 청계천 고가를 무대로 사라지는 도시풍경에 대한 아쉬움을 담았다. 작가는 고가 일대 건물들 내부가 이제는 폐허가 된 듯 해 황량함과 쓸쓸함을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꿈꾸는 서울…
유혜진 작 ‘물 위의 해체’. 작가는 부수고 새로 지어 올리는 공사들로 소란스러운 서울을 유동적인 디지털 공간으로 이해한다. 청계천 공사를 디지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해체와 재조립을 위한 ‘꿈’의 공간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청계천의 낮과 밤이 만들어 내는 일상을 비디오에 담은 작가 안세권 씨(35)는 “철거되는 청계천 고가를 보면서 꿈을 갖고 도시로 몰려 든 사람들의 이상이 무너지는 듯한 허무와 다시 유토피아를 만들려는 사람들의 희망과 비전을 동시에 느낀다”고 말했다. 2년여를 청계천 주변에서 맴돌았다는 그는 “이 시대 아웃사이더들의 생존 공간이자, 과거 현재 미래의 절망과 꿈이 공존하는 청계천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예술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지에 혼합 재료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주변을 사진처럼 옮긴 젊은 동양화가 정재호 씨(34)도 “어릴 적 차를 타고 지나던 청계고가는 마치 놀이동산에 온 듯 SF적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며 “철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이제 추억의 공간을 없애야 한다는 아쉬움으로 청계천을 그렸다”고 말했다.

청계천에 대한 작가들의 관심은 최근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청계천 프로젝트-물 위를 걷는 사람들’ 전으로 구체화했다. 이 전시는 회화, 조각, 영상 등 다양한 장르를 통해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도시근대화 과정과 땀방울 맺힌 민초들의 역사를 형상화한 예술적 기록들을 선보였다. 하루 평균 300∼400여명의 관람객들이 다녀가는 등 열띤 호응이 일어나 전시기간이 일주일 연장(22일까지)되기도 했다.

미술계에서는 청계천을 화두로 펼쳐지는 작가들의 시선에 대해 ‘더 이상 어렵고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주목하려는 최근의 미술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서울 시립미술관 이원일 학예연구부장은 “청계천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표현하려는 흐름은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실천적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러한 흐름은 이제 단순히 청계천이라는 공간을 넘어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를 주목하는 시선들로 바뀌고 있다. 쌈지스페이스가 4일 개막해 16일 막을 내린 ‘서울 생활의 발견-삶의 사각지대를 보라’ 전이 대표적 경우. 변두리 여관, 동네 목욕탕, 산동네 언덕길, 옥탑방 마당에 걸린 빨래 등 서울의 사각지대 곳곳에 시선을 집중한 작품들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전시를 기획한 강수미 씨는 “사회 내에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작은 내부를 들여다보고 이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다”고 말했다.

○ 일상속 생활과 미술 접목 시도

서울을 화두로 내 건 이번 전시는 올 들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다양한 서울 이미지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진작가 박홍천 씨는 지난 4월 갤러리 인에서 서울 이미지를 조각필름 1만여 개로 모자이크 한 서울 연작시리즈로 눈길을 끌었고, ‘도시주의 그룹 플라잉 시티’와 김선아 씨를 비롯한 젊은 전시기획자 그룹이 ‘Visible vs Invisible’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지난 1월과 3월 마로니에미술관에서 서울을 화두로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최근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서울에 대해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는 사진작가 배병우 씨는 “최근 예술가들의 시선은 산업화와 공룡도시란 거대 담론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한 ‘꿈과 생태도시 서울’로 옮겨가고 있다”며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그 주변과 서울 곳곳을 발로 다니면서 서울이야말로 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도시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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