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물고문 악령' 부활…1987년 경찰조사받다 질식사

  • 입력 2002년 11월 8일 23시 46분


심할 경우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만큼 잔혹한 물고문이 세상에 알려진것은 1987년 1월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 2부 건물에서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당시 21세·사진)군이 ‘물고문’을 당해 숨진 사실이 동아일보의 추적보도(87년 1월17일자)로 밝혀지면서부터다.

그로부터 15년9개월여 뒤인 올 10월 25일 최고수사기관인 검찰청사에서 이런 수치스러운 고문이 다시 자행된 것 같다고 검찰 스스로 인정한 것에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박군은 학내 시위 주도 및 당시 서울대 민추위 사건의 중요 인물과 연계돼 있다는 의혹을 받아 이날 오전 6시40분경 조모씨 등 경찰관 6명에 의해 치안본부 조사실로 연행됐다.

경찰은 박군이 순순히 자백하지 않자 이날 오전 11시10분경 조사실 내 목욕탕에 물을 채운 뒤 상의를 벗기고 양팔을 머리 뒤로 깍지를 끼게 한 뒤 물고문을 자행했다.

이 과정에서 숨을 참지 못한 박군이 상체를 젖히자 여러 명이 달려들어 강제로 머리를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결국 그는 욕조에 턱이 눌린 상태로 숨을 쉬지 못해 질식사했다.

박군을 처음 검안한 의사 오모씨는 ‘이미 조사실에서 숨진 상태로…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고… 바닥에 물기가 흥건했다’고 증언했으며 다른 부검의는 ‘박군의 목에 피멍이 있었다’고 전했다.

사건 발생 직후 경찰은 “조사경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차 속에서 숨졌다”며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에 기를 썼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고문 경찰관 2명을 구속하고 4개월 후에는 장세동(張世東) 안기부장, 정호용(鄭鎬溶) 내무장관, 김성기(金聖基) 법무장관, 서동권(徐東權) 검찰총장, 이영창(李永昶) 치안본부장을 경질했다.

또 사건 축소 조작에 간여한 박처원(朴處源) 전 치안감 등 3명이 추가 구속됐다.

야만적인 고문치사에 이어 은폐 조작 실상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6·10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많은 시민들은 “무고한 대학생이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사건과 동일하게 비교할 수 없지만 이 사건을 교훈 삼아 물고문과 같은 비인간적인 고문범죄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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