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문건 유출' 계기 공무원 비밀누설 한계 논란

  • 입력 2002년 8월 27일 19시 00분


《비밀 누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의 진상과 교육부의 대책 등을 담은 문건을 야당에 넘겨줘 경찰의 집중 수사를 받고 있는 김성동(金成東)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사건을 계기로 공직자의 ‘비밀 누설’ 문제가 핫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정권 교체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 앞으로도 이 문제는 계속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공무원의 비밀 누설과 관련한 실태와 논란 등을 살펴본다.》

경찰이 교육인적자원부 내부 문건을 한나라당에 제공한 김성동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에 대해 ‘비밀누설’ 혐의로 수사에 착수함에 따라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비밀누설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김 전 원장이 한나라당에 제공한 문건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편향성 논란과 관련해 언론의 보도 내용이 무엇이고 보도의 사실 여부, 교육부 대책 등을 메모한 수준으로 이를 과연 ‘비밀’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문건 제공 건 외에 김 전 원장 개인 비리에 대해서까지 경찰이 수사를 하고 있어 비밀누설 자체보다는 다른 구실로 당사자를 형사처벌해 ‘비밀누설자’에 대해 본때를 보여주려는 표적수사가 아니냐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아니더라도 공무원의 비밀 누설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어디까지를 ‘비밀’로 볼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누설한 내용이 조직 내부의 비리와 관련됐을 경우 비밀누설이 ‘국민의 알 권리’ 또는 ‘내부고발자 보호’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비밀누설의 해석과 사례〓형법 127조(공무상 비밀누설죄)는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법령에 의한 직무상 비밀을 제3자에게 알렸을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또 ‘공무상 기밀은 누설에 의해 국가의 기능이 위협받게 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비밀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는 대법원 판례(1996년 5월 10일)를 통해 적용 요건을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제주도를 방문해 지인들과 식사를 했다는 동향 보고서를 한나라당 제주도지부에 유출한 전 제주경찰서 정보과 임건돈(任建敦·57) 경사 사건은 공무상 기밀의 범위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사건.

당시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의한 ‘프락치 사건’이라며 대대적인 정치 공세를 펼쳤고 검찰은 임씨에 대해 비밀누설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법원은 당시 “문건의 주된 내용이 공무상 비밀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영장 기각 사유를 밝혔다. 임씨는 사건 직후 해임됐으며 불구속 상태로 기소돼 내달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1996년 4월 효산그룹의 콘도 허가과정에 특혜 의혹이 있다며 감사원의 비리 의혹을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현준희 주사는 법원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했다.

감사원은 이후 현씨가 허위사실을 폭로해 공직자의 품위와 감사원 명예를 손상시켰으며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외부에 누설했다는 등의 이유로 파면했다. 현씨는 감사원장을 상대로 파면처분 취소청구소송을 냈지만 2000년 3월 서울고법으로부터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다.

또 차기전투기(FX)사업의 외압설을 주장해 파문을 일으킨 조주형(趙周衡) 대령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공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조 대령이 군사기밀 누설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모호한 비밀누설 규정과 내부고발자 보호〓‘비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비밀누설죄로 기소되는 경우라도 법원의 판단은 사안에 따라 가지각색이다.

특히 비밀누설은 늘 국민의 알 권리 및 내부고발자 보호라는 측면과 충돌하기 때문에 이슈화될 때마다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다.

비밀누설을 했지만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부패방지법이 정하는 요건에 해당돼야 한다. 1월 25일부터 시행된 부패방지법은 공직자의 부패 행위와 공공기관 부패에 대한 내부 고발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발의 주체를 ‘공직자’로 한정하고 고발의 대상도 ‘부패’와 연관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실질적인 내부고발을 이끌어내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고발자는 부패방지위원회에 실명으로 신고하거나 제보해야만 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주형 대령의 경우 ‘외압’에 의해 선정이 이뤄졌다고 주장했지만 ‘외압’을 부패행위로 볼 수 없고 부패방지위원회에 고발하지 않고 언론사에 제보했다는 이유로 부패방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한편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해 “내부고발자의 신고 내용이 공무상 기밀인 경우에도 공무상 비밀누설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이덕우(李德雨) 변호사는 “내부고발자 보호가 미흡하기 때문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든 전문 영역에서 일어나는 비리와 부정은 묻혀질 수밖에 없다”며 “극소수 내부고발자를 보호하고 이익을 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바로잡습니다]

△8월 28일자 A8면 ‘사안 따라 처벌-보호 기밀 잣대가 없다’ 기사에 실린 ‘비밀누설죄의 한계’ 그래픽에서 ‘업무상 비밀누설죄’는 형법 제35조가 아니라 형법 제317조입니다.

이 훈기자 dreamland@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어느 내부고발자의 고백▼

“세상으로부터 ‘왕따’당하는 것보다 힘든 것은 없을 거예요.”

1990년 감사원 사무관으로 감사원의 비리를 폭로한 이문옥(李文玉·63)씨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김성동(金成東)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의 ‘기밀 유출’ 논란을 지켜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1990년 5월 감사원이 23개 재벌 계열사들이 땅투기를 했다는 혐의를 잡고 감사를 했지만 업계의 로비를 받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감사를 중단했다는 내용을 언론사에 제보했다. 그는 결국 직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구속됐고 감사원에서 파면당했다.

그러나 6년간의 기나긴 법정투쟁 끝에 그는 1996년 4월 대법원에서 무죄확정판결을 받았다. 당시 부동산 투기 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했던 상황에서 이씨가 공개한 내용은 정부나 국민 모두에 이익이 된다는 게 사법부의 판단이었다. 그는 같은 해 감사교육원 교수로 복직했고 지금은 민주노동당 고문을 맡고 있다.

“기밀을 누설한 범죄인 취급을 하니까 정말 지옥 같았어요. 국가기관의 감시 때문에 평소 가깝게 지내온 사람들의 왕래가 완전히 끊기고 철저히 고립됐지요. 생계유지도 어려웠어요. 아내가 그나마 중고할인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버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지만….”

이씨는 사람들로부터의 고립이나 생활고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배신자’나 ‘고자질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일부에서는 사회의 부정부패를 고발한 의인(義人)으로 봐주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뭔가 조직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니까 조직을 배신했다고 수군거리더군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는 이씨. 그는 김 전 평가원장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았다.

“문건을 한 정당에 유출해 정쟁으로 사용된 것이 아쉽지만 김 원장의 문건 유출이 순수한 공익차원에서 이뤄진 거라면 나처럼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를 빌미로 다른 개인비리까지 들추는 수사는 없어져야 할 관행입니다.”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비밀누설죄' 전문가 진단▼

전문가들은 공무상 비밀누설죄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의적으로 적용될 여지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비밀누설죄의 자의적인 적용을 막기 위해서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내부고발자 보호 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흥식(朴興植)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공무상 비밀누설 건은 그때그때 법원의 판단에 따라 기밀이냐 아니냐가 정해질 수밖에 없다”며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내부 고발을 해야 보호받을 수 있는지를 상세히 규정해야만 ‘비밀누설’과 ‘내부고발자 보호’의 충돌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현행 내부고발자 보호 규정을 포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행 부패방지법은 공직자가 부패방지위원회에 공직사회의 부패와 비리 관련 사안을 고발했을 때에만 보호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지문(李智文) 내부고발자센터 소장은 “고발 주체를 반드시 공직자로 한정하지 말고 부패와 관련이 없더라도 내부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도록 하며 언론사나 시민단체 등 객관적인 기관에도 고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6년 내?寬紫像謎맬9萱?만들어 시행 중인 미국은 부패뿐만 아니라 정책 실패, 예산 낭비, 국민건강과 안전의 침해 등 공익적 가치에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부고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편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시되는 민주사회에서는 공무상 기밀의 범위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한인섭(韓寅燮) 서울대 법대 교수는 “최근에는 법원의 판례도 기밀의 범위를 좁게 해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는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공론화돼야 할 내용들이 기밀이라는 이유로 알려지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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