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플레이]"부 추구하면서 부자에게 적대적"

  • 입력 2002년 4월 5일 18시 56분


한국에서 오래 살아온 외국인으로서 한국인이 특별히 책임 회피와 전가가 심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우선은 그 상황을 피하고 싶고 남에게 책임을 미루고 싶은 것은 영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 사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가 정치인들의 말바꾸기와 툭하면 터져 나오는 음모론이다. 한국에서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가 죄를 지어 검찰에 출두할 때 단 한번도 “내 잘못이다”고 말하는 경우가 없다.

모두가 “억울하다. 검찰 조사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결국 진상이 밝혀지면 “정치적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거나 “나는 깃털에 불과하다”는 등의 얘기를 한다. 이런 일련의 책임 회피와 전가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원인이 된다.

정치인들이 때와 상황에 따라 밥먹듯 정당을 바꾸고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뒤집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영국에서 보수당원이 노동당원으로, 노동당원이 보수당원으로 이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과거에 살아온 행적과 말을 하루아침에 고스란히 바꿀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일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민은 그런 정치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책임 전가 현상의 근저에는 유교 전통과 오도된 평등의식의 영향도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정에서는 가장이, 회사에서는 사장이, 학교에서는 교사가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개인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풍토가 조성되기 어렵다. 한국에서의 잦은 장관 교체도 따지고 보면 정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특정 인물에게 떠넘기는 ‘네 탓’ 풍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국인은 모두 개별적으로는 부와 권력을 추구하지만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태도는 어느 나라 사람보다 적대적이다. 영국에서는 세습되는 상원이 있지만 이 같은 지위는 선조의 근면과 지혜로 얻어진 것이라고 국민은 생각한다.

반면 한국인은 부와 권력을 부정부패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웃의 성공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폄훼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빈센트 윌리엄스

보건복지부 한국보건산업진흥원 보건자문관·영국인

정리〓정성희기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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