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망부가' 권 교수 아내 한전씨의 편지 전문

  • 입력 2001년 1월 29일 15시 55분


《권종진 교수의 아내 한진씨가 식물인간 상태로 있다가 잠시 호전되었던 94년 4월7일 힘겹게 쓴 편지의 전문. 남편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내용이 심금을 울린다.》

승수, 민수 아빠

미안해요. 지난 4월4일 우리들이 결혼한지 열다섯돌이자 당신의 마흔여섯번째 생일이지요. 당신도 잊지 않았을 테고 역시 나도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날 아침에 거기에 대해선 아무 말 없이 다른 말 몇마디 하고 헤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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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그런 말이 무슨 소용있겠어요. 우리는 함께 꼭 100달을 살고 떨어져 지낸지가 80달이 되네요. 여의도의 새 아파트에 이사한지 꼭 100일만에 내가 쓰러졌지요. 5월9일에 이사해서 8월17일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한가롭게 고통이 적으니까 별것을 다 헤아려 보는가 봅니다. 늘상 바쁘게 생활하는 승수 아빠를 생각하면 죄스러울 뿐입니다. 너무나 지루한 세월을 견디어 달라고 감히 요구할 기력도 양심도 내겐 없습니다.

나로 인하여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엄청난 수고와 무거운 짐을 덜어드릴 꿈도 꾸지 못하니 당신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피할 능력만 허락하면 멀리멀리 달아나고 싶어요. 그럴 때마다 함께 지내면서 겪었던 슬픔과 많은 아픔들이 생각이 나요.

어찌해 잊어야 할 기억들은 점점 더 선명하게 자리를 비우지 않고 자라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에게 행복은 허락되지 않는 행운인가 봅니다. 오랜 시련 끝에 얻은 모처럼의 안정에 비록 불완전하지만 만족한 순간이었고 비로소 앞날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시기였는데.

우리 사람들은 참으로 너무나 어리석고 부족하여서 한치 앞의 일도 모르면서 웃고 울고 앞일을 마음가는 대로 결정하는가 봅니다. 아이들 잘 키우고 당신하는 일 잘 이루어지면 노후에 안락한 휴식처에서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만 기다릴줄 알았어요. 세상물정에 눈감고 철없이 감정이 원하는 곳으로만 치닫던 우스운 지난 날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리고 보훈병원에 갔을 때 무더위 속에 공포감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찾아온 당신에게 나는 그곳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 당신은 말없이 땀과 눈물에 절어버린 나를 휠체어에 싣고 음료수 하나를 쥐어준 채로 곁에 앉아 끝없이 침묵한 채 줄담배를 피웠지요.

빗줄기는 한없이 내리퍼붓고 우리가 만들고 있던 장면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 겁니다. 점점 힘이 들어 글쓰기가 어렵네요. 잠시 쉬었다가 쓸래요.

힘없이 자꾸만 떨어지는 왼손을 잡아주면서 괜찮으냐고 처음 물었지요. 내가 눈을 껌벅이자 다시 침묵.

"이제 다 왔어."

들것에 실린 채 당신이 홀로 나를 밀고 저 중환자실 문을 들어설 때는 다시 덮개에 씌어진 채 실려나갈 앞으로의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끔찍했어요.

아픔과 괴로움 외로움과 고달픔에 시달리면서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 겨울을 넘기면서 어김없이 찾아드는 계절이 덧없이 반복해 바뀌면서 몇해가 지났고 올봄이 시작할 때 나는 또 당신의 치료를 받았는데 그러기 전에 나는 참 많이도 망설였고 많이도 기도했어요.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 흥분이 가신 뒤에야 안도감을 느끼고 진실로 감사했고 무척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나의 얼굴은 작은 포로써 덮여졌고 나의 몸은 시트로 가리워졌지요. 마찬가지로 당신의 얼굴은 안경과 마스크로 덮여 있었고 당신의 몸은 흰가운으로 가리웠지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과 몸을 볼 수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는 있었어요.

나는 당신 손에 치료받는 것이 무척 기뻤어요. 가버린 세월만큼 잇몸은 상했을 터이고 우리도 많이 변했지요. 치료를 받는 짧은 시간 속에 당신을 만나 함께 한 모든 일이 생각났어요.

처음 본 순간의 느낌. 아기 가졌을 때 사가지고 오던 홍합국의 따끈함….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지만 잘 안됐어요. 생각을 딛고 '진공 상태에 돌입' 하면서 기억하는 기도문을 외었지요. 그때 당신이 "나도 이제 늙었나봐. 눈이 잘 안보여" 하셨죠. 글쎄 왜 눈이 침침했을까요. 당신도 나처럼 눈물을 참는 걸까요.

"괜찮아. 긴장하지마. 마음 푹 놓아. 어이구 많이 상했군."

하지만 여전히 마음도 입술도 떨렸습니다. 치료가 끝나고 뜻밖에 커피를 먹을 때 진정으로 기뻤습니다. 내 생전에 그처럼 맛있는 커피는 처음이에요. 욕심을 부리자면 세컵이 아니라 열두컵이라도 마시고 싶었지요. 여러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어도 실제로 만난다는 건 당신도 나도 민망스럽고 부끄럽지요. 죄 지은 건 아니지만 드러낼 일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친절하게 도와준 여러분께 정말 고마웠어요. 물론 당신에게 제일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양치질을 해주면서 팔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나 또는 엄청 힘들다면서 목을 움직일 때, "내가 너무해. 내가 너무하다" 할 때는 차마 못할 짓을 너무도 많이 너무도 오래 한다 싶어져서 한시 바삐 어디론지 당신 곁에서 사라지고 싶어요.

당신에게 지은 잘못과 허물도 태산을 겹겹이 이어놓은 태산준령과 같아서 아무래도 살아서나 저 세상에 가서나 용서받기 힘들 것입니다. 그저 미움도 원망도 모두 잊고 용서해 주세요. 수많은 고통, 아픔, 괴로움, 뼛속을 파고드는 외로움도 견딜 수 없는 피곤함과 고달픔, 가장 큰 경제적 어려움과 마음고생을 어찌해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잘 견디어 주십시오. 사노라면 고통의 끝이 오겠지요. 이러한 어려움, 모든 상황과 처지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길이 하루 속히 열리기를 갈망하면서 슬픈 빛을 띤 모든 기억을 지우고, 챙겨보면 기뻤고 즐거운 추억도 몇가지 있을 겁니다.

가령 내게 가장 흐뭇한 추억은 대낮에 명동 길에서 당신을 만났던 길인데 참말로 우연히 머리손질 하러 가던 중에 윤수씨하고 점심 약속으로 명동에 있던 당신을 만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복판에 서서 "한전, 한전, 한전" 하고 부르실 때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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