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파업 또 유보]구조조정 정부에 힘 실린다

  • 입력 2000년 11월 30일 01시 33분


《한국전력 노조가 사상 초유의 전력 파업을 다시 유보하면서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정(勞―政)간 ‘힘의 균형’은 정부쪽으로 급속하게 기울 것으로 전망된다.

한전 노조가 29일 자정까지 열린 한전 및 정부와의 협상에서 아무런 과실도 없이 ‘국민 불편 해소 및 대승적 차원’에서 파업을 유보한 것은 파업 강행에 따른 부담이 워낙 컸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노조 입장에서는 파업 경험이 전무하고 파업에 돌입할 경우 여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무엇보다 우려했던 것 같다.

또 파업에 돌입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조합원이 동참할 것인지, 또 통제권 밖의 일부 조합원이 전력 공급을 끊는 등 불상사가 발생할 경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 가능성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정부가 “민영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미미한 명분을 빌미로 ‘퇴로’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오경호(吳京鎬)노조위원장은 정부 및 정치권의 각계 인사로부터 파업 철회 압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조 입장에서는 파업 유보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한차례 파업을 연기한 상태에서 아무런 명분없이 다시 파업을 연기할 경우 조합원들이 반발하고 노동계 동투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오위원장은 이를 의식한 듯 기자회견을 마치고 도망가듯 협상장을 빠져 나갔다.

한전 노조의 파업 여부는 노동계 동투의 첫 분수령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한전 노조가 파업을 유보함으로써 노동계 동투도 급속하게 힘을 잃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오위원장은 30일 향후 투쟁계획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 관계자는 “12월 3일까지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을 경우 12월 4일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전했다.

12월 4일은 국회 산업자원위의 한전 민영화 관련 법안 통과가 예정돼 있는 날이다.

그러나 이미 두차례 파업을 연기한 상태에서 중앙노동위원회 특별조정이 결렬되더라도 12월 4일 파업에 돌입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이래저래 한국통신 철도 등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금융권 구조조정 반대투쟁 및 제도개선 투쟁 등 노동계의 동투는 빛이 바래게 됐다.

이 때문인지 한국노총 관계자는 “한전 노조의 파업 재연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면서 노조측을 비난했다.

<정용관기자>yongari@donga.com

▼정회… 속개… 중앙노동위원회 면담후 돌파구▼

29일 중앙노동위원회 특별조정회의는 당초 예정보다 3시간 늦은 오후 5시부터 시작됐다. 노조가 경찰력 배치를 겨냥, “신변 위협 때문에 회의를 할 수가 없다. 제3의 장소에서 하자”고 주장했기 때문.

중노위가 노사 양측의 합의로 노조원들이 중노위 건물 현관 로비까지 진출해도 괜찮다는 협조 공문을 경찰에 보내 가까스로 회의가 시작됐으나 노조는 “책임있는 산업자원부장관이 직접 참석해야 한다”고 요구, 또다시 정회됐다.

실랑이 끝에 오후 8시 회의가 속개됐고 김원배(金元培)중노위상임위원 등 3명으로 구성된 조정위원이 양측을 상대로 조정을 시작했으나 양측의 시각차는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노조 오경호(吳京鎬)위원장은 “민영화가 정 필요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적어도 3∼5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의 의미는 법안을 통과시키더라도 분할 자체를 늦추자는 입장으로 풀이됐다.

한전 최수병(崔洙秉)사장은 공식 회의 석상에서는 말을 아꼈다. 산자부는 “민영화 법안의 국회 통과를 예정대로 추진하고 한전을 분할한 뒤 매각은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을 고수, 접점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 노조의 파업 유보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김원배 중노위 상임위원 등 조정위원이 노사 양측과 개별 면담을 벌이면서부터.

양측의 입장을 충분히 들은 조정위원들은 “일단 파업은 연기하고 12월3일까지 추가 조정기간을 갖자”고 제안했고 파업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노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극적으로 파업이 유보됐다.

<정용관기자>yongari@donga.com

▼정부 입장…"이제 큰강 건넜다" 민영화 박차▼

또 한차례 파업 유보는 사실상 정부의 승리로 볼 수 있다.

한전 구조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산업자원부와 한국전력측은 ‘이제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는 분위기다. 노조가 두 차례나 파업 대열을 해산함으로써 스스로 투쟁의 전열을 흩뜨렸다는 분석을 내린 것이다.

정부는 사실상 노조의 저항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보고 구조개편법안의 국회 통과를 위한 작업을 예정대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노조가 파업 가능성 자체를 철회한 것은 아닌만큼 다시 파업에 나설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나 노조의 ‘실력’을 파악한 만큼 노조의 파업 위협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판단이다.

특히 파업 사태에 대한 여론의 빗발치는 비판을 확인한 만큼 설사 노조가 다시 파업에 나서더라도 그 폭발력은 대수롭지 않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다만 한가지 변수는 한나라당이 제기한 ‘구조개편법안은 통과하되 민영화 시기는 연기하자’는 방안에 대한 대응이다.

산자부는 여기에 대해 아직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2, 3년을 두고 서서히 민영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구조개편 법안이 통과하면 신속히 민영화 일정을 진행해야 한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나라당과의 정치적 절충을 통해 타협안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조의 전면파업이라는 최악의 사태는 사실상 피하게 됐다고 판단하는 만큼 정부의 민영화 행보는 앞으로 상당한 탄력을 받게 될 전망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이제 큰 강은 건넜다”면서 “남은 기간 동안 신속한 구조개편 및 민영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작업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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