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油價 비상 함께 넘자]한국도 '강건너 불' 아니다

  • 입력 2000년 9월 13일 18시 53분


프랑스 남부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마르세유 주민들은 따사로운 햇살을 즐길 기분이 아니다. 석유 때문에 짜증이 극에 달해 있다. 고유가에 항의하는 트럭 운전기사들의 시위로 석유 유통망이 마비되었고 이로 인해 석유부족 사태가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를 포함, 유럽대륙은 10여일째 ‘고유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일부 철도와 도로 통행마저 지장을 받고 있다.

한국에도 ‘고유가 태풍’이 몰아닥칠 조짐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고유가 문제는 아직 ‘바다 건너의 불’인 듯하다. 기름 한 방울 안나는 100% 석유 의존국. 특히 다른 어느 나라보다 직접적인 고유가 충격에 직면한 한국은 의외로 조용하다.

이번 추석에 승용차로 고향에 다녀온 이정훈(李政勳·32·회사원)씨는 꽉 막힌 길 위에서 귀성에 드는 연료비 계산을 해봤다. 휘발유가 이달 들어 ℓ당 1329원으로 오른 걸 기준으로 해보니 광주까지 왕복에 대략 14만원. 산술적으론 작년 추석에 1200원대였을 때보다 10% 가량 지출이 늘어난 정도. 하지만 이씨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부담감은 훨씬 심하다.

‘다음달엔 휘발유값이 또 오를텐데….’

매일 승용차로 출퇴근하는 이씨는 휘발유값이 인상될 때마다 ‘지갑에 빨대를 꽂아 놓고 빨아 먹히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씨는 “이제 승용차는 집에 두고 지하철로 다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주부 김영선(金英善·38)씨의 요즘 가계부 쓰는 심정도 마찬가지다. 연료비 항목을 기재할 때마다 지갑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다. 승용차 유지비에다 가스비용, 전기료 등이 매달같이 상승곡선을 그리면서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년 새 10%에서 15%대로 높아졌다. 그만큼 다른 부분의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다.

‘고유가 태풍’은 씀씀이는 물론 생활형태까지 바꿔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유가 상태에서 주가는 오르기 쉽지 않다. 안정세를 보이는 물가에도 당장 비상이 걸렸다. 그러잖아도 하강기에 접어든 한국경제로선 이중 삼중의 타격이다.

한국은 과거 고유가 쇼크를 이겨낸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때 얻은 ‘교훈’은 잊은 지 오래다. 유가가 내림세를 보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에너지 소비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경제성장률 대비 에너지 증가율인 ‘에너지탄성치’가 세계 최고 수준. 91∼97년 에너지소비증가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1.5%일 때 우리나라는 11.4%로 8배였다. 경제개발 과정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정부와 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어버렸다는 증거이다.

이번 에너지 쇼크는 장기간의 ‘일상’으로 굳어질 공산이 큰 것으로 지적된다. ‘마라톤’과 같은 신중하고 장기적인 에너지 전략이 필요하다. 소비자들의 에너지 절약 습관도 완전히 바꿔야 할 때가 왔다는 지적이다. ‘고유가 태풍’의 충격을 완충, 흡수하는 지혜와 실천이 절실하다.

<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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