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불신받는 국가시험 실태와 대책

  • 입력 1999년 9월 26일 18시 58분


“국가시험의 몇몇 문제는 하느님도 정답을 모른다. 오로지 행정자치부만 안다.”

국가시험을 불신하는 수험생들의 푸념이다. 국가시험의 정답오류 시비는 해마다 반복되는 고시촌의 화두지만 합격자에게는 축하연의 안주거리로, 불합격자에게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식의 울분에 그쳤다.

그러나 최근 ‘행자부가 채점한 정답이 잘못됐다’는 법원 판결이 잇따르면서 국가시험 관리시스템 전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정부의 신뢰성까지 위협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출제문제 검토시간 없어"]

▼허술한 출제와 채점▼

사시 행시 외시 등 국가시험 1차시험의 경우 과목당 3명의 출제위원은 시험일 20∼30일 전에 행정자치부로 불려가 한나절만에 출제를 마친다. 2차시험의 주관식 문제는 시험당일 2∼3시간만에 문제를 선정한다.김형선 행자부 고시과장은 “국가시험에 동원되는 출제위원이 연간 1000명이 넘기 때문에 숙식까지 제공하며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97년 행정고시 2차시험에서는 한 출제교수의 중간고사 문제가 거의 그대로 나오는 바람에 시험을 중단하고 새로 문제를 내는 소동을 빚었다.

서울대 L교수는 “출제위원으로 들어갈 때마다 문제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문제은행에서 시험문제를 고르는 선정위원을 맡았던 교수들은 “문제은행의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한다. 문제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것.

사설 고시학원은 모의고사 한 과목(40문제) 출제비용으로 100만원 이상을 지불한다. 그러나 행자부 문제은행에 1문제를 넣고 받는 돈은 5000원 안팎.

출제와 채점과정의 보안도 심각한 문제. 1차시험 출제교수는 시험당일까지 약 3주간 학교로 돌아가 자유롭게 강의를 할 수 있다. 행자부는 ‘문제유출을 않겠다’는 서약서 한장만 받고 “교수의 양심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할 뿐이다.

약 3500명이 응시하는 사시 2차시험 주관식 답안을 채점하는 교수들은 두달간 하루 10시간씩 매달리는 채점작업보다 ‘답안지를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더욱 고통스럽다. ‘답안지 몇장만 분실하거나 도난당하면 재시험을 치는 대형사고가 생긴다’는 공포에 떤다는 것.

행자부는 “분실사고가 나면 큰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수만장의 답안지를 복사해 보관할 만한 인력도 돈도 없다”고 말했다.

[채점오류 당락 바뀌기도]

▼잘못된 정답▼

질낮은 문제은행과 허술한 출제시스템은 정답시비를 낳는다. ‘잘못된 정답’이 처음 확인된 것은 94년 사시 1차시험 문제. 불합격한 설모씨(35)가 “헌법 2문제의 정답이 2개”라며 행자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이긴 것. 이 재판과정에서는 쟁점이 된 2문제 외에도 행자부가 채점 도중 4문제의 오류를 발견해 정답을 정정한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사시 1차시험도 재판결과 7문제의 오류가 밝혀졌다.

고시연구사 권혁춘(權赫春)편집부장은 “경쟁이 치열한 국가시험은 커트라인 근처에 수백∼수천명이 몰려있어 1,2문제 차이로 당락이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답안지 문제 공개해야"]

▼명분없는 비공개▼

지난해에 행자부를 상대로 소송을 낸 신모씨(36)가 재판과정에서 겪은 해프닝. 신씨는 40회 사시 1차시험 민법 17번 문제의 정답이 4번이라고 주장했다. 정답에 대한 소견을 밝힌 교수들 중 일부는 신씨의 주장에 동의했고, 몇몇 교수들은 3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행자부는 “1번을 정답으로 채점했다”고 밝혔다.

문제와 정답은 정보공개법상 비공개대상으로 분류돼 있어 행자부가 어떤 문제를 냈고 무엇을 정답으로 채점했는지 알 수가 없다.

김형배(金亨培)전고려대교수는 “문제를 공개해 정답에 대한 합의를 도출한 뒤 채점한다면 낭비적인 법정다툼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독일변호사 박승관(朴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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