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회장 이력서]하루 25시간 뛴 「성장시대 영웅」

  • 입력 1999년 8월 17일 19시 19분


◇6·25때 신문팔아 가족부양

신문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소년은 뛰었다. 6·25전쟁 통에 5남1녀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대구까지 함께 피란온 모친과 동생은 그의 신문팔이 수입으로 입에 풀칠하는 신세였다.

피란지 대구에서 신문은 고향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피란민들의 유일한 정보원(情報源). 경기중학을 다니다 전쟁을 만난 김우중(金宇中)은 타고난 뜀박질 실력과 신용거래를 앞세워 신문배달 ‘상권’을 장악했다.

전쟁이 끝나 서울 장충동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친(김용하·金容河 전대구사범학교 교장)의 납북으로 가세는 기울었다. 고학으로 연희전문학교를다닌그는부친과친분이 깊었던 김용순씨의권유로한성실업에 입사하게 된다.

이곳에서 무역실무를 익힌 김우중이 무역부장을 끝으로 대우실업을 세운 것은 31세 때인 67년3월. 샘플원단을 들고 동남아로 출장을 떠난 그는 1주일만에 나일론 트리코트지와 폴리에스테르 트리코트지 30만달러어치를 수주했다.

당시 연간수출액은 2억5000만달러. 갓 설립한 무명의 무역상이 올린 수주액으로는 경이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동남아시장에 퍼진 ‘트리코트김’이란 별명은 국내에도 알려졌다.

섬유수출이 한국의 달러박스였던 69년 김회장은 미국시장에 눈을 돌린다. 국가별 수입쿼터제를 도입할 것이란 정보를 미리 들은 그는 수익성을 무시하고 물량을 대거 늘려 미국에 섬유를 수출하는 아시아업체 중 1위를 차지했다. 72년 미국이 수입쿼터를 실시하면서 대우실업은 창업 5년만에 5300만달러어치를 수출, 국내 최대의 섬유수출업체로 부상했다.

김회장과 대우실업의 성장은 70년대 ‘월급쟁이 신화’인 동시에 외형성장에 치중해온 한국 경제의 부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축약판’이다. 그의 성장신화의 밑거름 중 하나는 수출드라이브에 목을 매달았던 권위주의 정권과의 우호적 관계였던 것도 사실이다.

◇부친은 朴前대통령의 스승

대구사범에서 부친 김용하씨의 가르침을 받았던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은 수시로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옛스승의 아들을 다독거렸고 잇따라 부실기업 인수를 권유하면서 대우를 우회 지원했다. 70년대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 조선공사(대우중공업 조선부문)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의 인수대가로 거액의 은행돈을 빌리면서 대우는 점점 차입경영에 무감각해졌다.

재계 인사들은 하나같이 김회장을 ‘일벌레’로 부른다. 70년대 중반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김회장은 자택을 거치지 않고 서울역앞 그룹사옥으로 직행하기 일쑤였다.

때론 아예 현장사업장에 머무르기도 했다. 옥포조선소에 상주하면서 흑자로 전환시킨 것이나 92년 GM과의 결별로 위기에 빠진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에 상주하며 신차 모델개발을 독려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 최근 부평공장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김회장의 마지막 승부수다. 김회장의 끝없는 도전의식과 저돌성은 성장시대의 미덕이었다. ‘1분을 하루같이 썼던’ 그의 근면함이 어우러져 대우그룹은 78년 42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성장했다. 82년엔 그룹회장제를 신설, 명실공히 재벌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외형성장의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제품 기술력의 한계였다. 김회장은 평소 “죽기 전에 세계 1위제품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사실 대우는 어떤 진출업종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90년초 뒤늦게 기술개발에 나섰지만 삼성 LG 등 경쟁재벌들과 한참 격차가 벌어진 뒤였다.

김회장에게 금융은 제조업의 성장을 도와주는 보조수단이었다. 다른 재벌들도 비슷한 처지였지만 정권과의 우호적 관계에 힘입어 대우는 ‘은행돈쓰기’에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IMF후 ‘재벌망국론’에 상심

그러나 김회장은 IMF관리체제 이후 정부의 보호막이 걷히고 금융시장의 신뢰가 제조업의 목줄을 잡는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읽지 못했다. 오히려 쌍용자동차를 인수했으며 세계 최고수준의 설비로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역발상’을 설파했다.

측근들은 김회장이 IMF 이후 몰아친 ‘재벌망국론’에 크게 상심했다고 말한다. 한 측근은 “재벌의 공을 무시하고 잘못만 추궁하는 여론이 불거질 때마다 김회장은 재계의 ‘명예’를 되찾자고 말했다”고 전한다. 환란(換亂)의 주범으로 재벌체제가 언급될 때마다 일벌레로 살아온 자신의 평생이 매도되는 데 대해 참담함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전경련회장에 취임한 직후 전경련도 스스로 비판할 것은 비판하는 건전한 정책대안 집단으로 거듭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불행히도 국내외 사업장의 열악한 재무구조는 김회장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오히려‘구조조정에 역행한다’는 안팎의 비판에 직면했다. “세계경영을 한다는 사람이 달러도 빌려오지 못하느냐”는 면박을 받기도 했다.

◇무리한 차입경영으로 몰락

인수기업을 정상화하기도 전에 이를 바탕으로 새로 돈을 빌려 사업장을 세우는 차입경영에 해외투자자들은 우려를 거두지 않았다. 80억달러에 달하는 대우 해외투자액의 80% 가량은 차입금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해외투자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GM과의 지분협상이 결렬된 지 두달 뒤인 11월 대우 사장단회의에서는 김욱한(金昱漢)부속실 사장의 주도로 계열사 구조조정안이 공개됐다. 다른 그룹에 비해 1년이나 늦게 시동을 건 셈. 그나마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진통을 겪다 올 4월 구체적인 안이 확정됐다. 5월초엔 사장단 절반이 퇴진하는 재계 사상 초유의 최고경영진 구조조정안을 시행했다. 그러나 국내 금융시장과 해외투자자들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재계에서 ‘대우의 부도설’은 만성화된 루머였다. 김회장은 80년 신군부 등장으로 큰 위기를 맞았고 92년 대통령선거 출마와 95년 노태우(盧泰愚)대통령 비자금사건 등으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80년대 후반엔 대우조선의 부도설이 퍼져 사재 일부를 수혈하는 등 진화에 나선 끝에 기사회생시키기도 했다.

김회장은 그룹 해체의 위기를 맞은 지금도 몸에 밴 낙관주의로 자신의 노련한 돌파력을 믿고 있을지 모른다. 재계는 그러나 “김회장이 넘어야 할 위기는 다름아닌 시장제재”라며 그의 재기 가능성에 고개를 젓고 있다.

김회장은 창업세대이면서도 전문지식을 갖춘 전문경영인 체취를 물씬 풍긴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재벌개혁 드라이브 속에서 김회장이 어떤 명예로운 수순을 밟을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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