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11돌]주역들의 감회와 근황

  • 입력 1998년 6월 9일 19시 44분


민주화와 개혁의 열망으로 하나가 된 온 국민의 뜨거운 함성이 전국을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게 했던 87년 6월항쟁.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11년전의 ‘그 여름날’은 이제 기억 저편으로 묻혀져가고 있다. 하지만 그날의 권위주의통치와 강압에 맞서 감연히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한 정신만은 오늘도 이땅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그해 1월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과 관련, 박군이 숨진 조사실 바닥에 물기가 있었고 폐에서 수포음(水泡音)이 들렸다고 증언, 고문치사사건을 단순사고사로 몰고가려던 경찰의 기도를 무산시킨 오연상(吳演相)박사. 당시와 똑같이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로 진료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는 그는 9일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박군의 사인을 심장쇼크사로 조작하라는 강요와 협박을 이겨내고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동아일보 사회부 정동우(鄭東祐)기자에게 공식확인해 준 황적준(黃迪駿)박사도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잊혀지지 않는 인물.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이었던 그는 현재 고려대 의대 법의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선배들로부터 당시 상황을 전해들은 학생들이 지금도 당시 상황을 물으며 ‘박사님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할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든다”며 “지금 다시 그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11년전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부와 경찰의 협박성 강요에도 불구하고 부검에서부터 경찰을 모두 배제하는 등 박군의 사인 규명에 결정적 기여를 한 안상수(安商守)당시 담당검사는 검찰에서 물러난 뒤 96년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6월 항쟁은 부도덕한 정권에 대항해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위직 경찰관 2명에게만 박군 고문치사사건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운채 사건을 덮으려던 경찰의 축소 은폐조작 기도를 폭로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金勝勳)신부는 현재 서울 시흥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김신부는 9일 “비록 지금 국가가 어려움에 처해있지만 6월 항쟁 당시처럼 모든 국민이 다시 하나로 뭉친다면 지금의 위기도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으로 김신부와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이끌었던 함세웅(咸世雄)신부는 현재 서울 상도동교회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가톨릭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정권의 비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하나로 묶어낸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간부들은 이후 정치권과 재야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국본의 각계 대표로 당시 성공회에서 농성하며 6·10대회를 주도해 20여일간 옥고를 치러기도 한 13명중 김명윤(金命潤) 제정구(諸廷坵) 이규택(李揆澤)씨는 국회의원으로, 송석찬(宋錫贊)씨는 대전 유성구청장으로 정치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현두기자〉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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