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中企人 「IMF하루」]「신문지 이불」 유랑노숙

  • 입력 1998년 3월 9일 19시 49분


‘집없는 사장’들이 지하철 통로에서 잠을 청한다.

9일 오전 1시. 서울역 지하통로. 거리의 불빛이 꺼지고 상점의 셔터는 모두 내려지면서 4백여명의 집없는 행려자(行旅者)들이 몰려든다. 종이박스와 신문지로 ‘이불’을 까는 사람, 거저 주는 국밥을 얻어먹기 위해 줄을 선 사람….

회사를 날린 전직 ‘중소기업 사장’ 박상수(42) 김영진(47) 김동희씨(48)는 거기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남대문시장 입구 지하철4호선 회현역으로 발길을 옮긴다. 복권판매대 옆에 있는 구석이 이들의 보금자리. 서울역은 ‘고참 행려자’들의 텃세가 심해 잠자리를 마련하기 힘들다.

3,4개월 전만 해도 어엿한 ‘사장님’이었던 세 사람. 그러나 부도를 겪은 후 모두 1억여원의 빚을 져 전재산을 날리고 가정까지 파탄나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됐다.

“처음엔 오리털 파카에 넥타이 차림으로 이곳에 왔죠. 그런데 무료급식도 안주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곱지 않아 벼룩시장에 가서 비닐 잠바를 사 갈아입었지요.”

보름전 이곳에 온 김영진씨. 얼마전까지만 해도 월성 원자력발전소 등 각종 발전소 건설에 참여했던 하청업체 사장이었으나 1월 거래처부도로 직원 50여명을 내보내고 자신도 거리로 내몰렸다.

자동차 범퍼를 생산하는 공장을 경영하던 박상수씨는 기아자동차 부도로 함께 무너진 경우. 그는 “아내는 도망갔고 유치원생 딸은 충북 보은의 아버지집에 맡겨놨죠. 친척들에게까지 빚을 져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며 연방 소주를 들이켰다.

금속가공업체 사장을 지낸 김동희씨. 이곳에 온지 3개월이 되도록 옷은 못갈아 입어도 구두는 닦고 다닌다. 그는 “아직은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앞으로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구걸을 하게될지 나도 모르겠다”고 막막해했다.

오전 5시. 추위에 웅크렸던 몸을 추스르고 잠에서 깨어나 남대문 인력시장으로 향한다.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 매일 아침 가보지만 일감을 얻어본 적은 없다. 점심은 탑골공원이나 용산역광장 무료급식소에서 허기를 채운다.

현재 서울역 영등포역 충정로역 용산역 을지로입구역 등지에서 기거하는 ‘홈리스’들은 2천여명. 앵벌이 전과자 행려자 틈새에 국제통화기금(IMF) 한파 이후 이처럼 부도난 사장들도 끼여들었다.

87년부터 영등포역에서 행려자들과 함께 생활해온 광야교회 임명희목사는 “앞으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는 4, 5월에는 생계가 곤란한 실직자들이 대거 지하철로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전승훈·김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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