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10돌/당시 인권상황]억압…폭압…강압…

  • 입력 1997년 6월 11일 09시 52분


6월 항쟁 직전의 5공 정권은 정권말기로 치달으면서 더욱 광분했다. 5공 정권은 국민의 비판과 저항을 억누르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극한적인 공권력을 행사했다.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들을 붙잡아 가장 야만적인 고문으로 인간존엄성의 원천인 생명까지도 앗아감으로써 정권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지탄을 받기에 이르렀다. 87년은 시작부터 비극이었다. 그해 1월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집단폭행과 물고문끝에 朴鍾哲(박종철)군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박군 고문치사사건은 은폐―축소―조작 과정이 동아일보의 끈질긴 추적보도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노력 등으로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정권차원의 문제로 비화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박군 물고문치사사건의 발생과 은폐공작을 87, 88년 두 해에 걸쳐 끈질긴 추적조사끝에 특종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또 당시의 권력상층부가 이같은 범죄행위를 알고도 은폐하거나 은폐공작에 직접 가담한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더 이상 강압적인 수단에 의한 권력유지가 불가능하도록 5공 정권을 막바지로 몰아넣었다. 박군 사건은 고문이 수사기관의 당연한 권리행사로까지 여겨질 정도로 관행화한 당시의 인권유린이 낳은 결과였다. 부천서에서 자행된 權仁淑(권인숙)씨에 대한 성고문사건은 성까지도 고문의 대상이 됐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이 사건은 권씨의 목숨을 건 폭로로 표면화했지만 그 진상은 정권이 바뀐 88년에야 성고문 경찰관 文貴童(문귀동)씨가 구속됨으로써 밝혀졌다. 박군 고문치사사건 이후에도 고문은 끝나지 않았다. 「노동해방 연구회」사건으로 구속된 김영진씨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두 다리와 팔에 중상을 입고 깁스를 해야 할 정도로 고문을 당했다. 「제헌의회그룹」사건 구속자들은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돼 20∼50일간 불법구금 상태에서 조사받으며 무차별 구타와 통닭구이, 코에 물붓기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아직도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의문사사건도 잇따랐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한 억압과 침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많은 인권운동가들은 박종철군과 권인숙씨 등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87년 당시 인권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던 洪性宇(홍성우)변호사는 『10년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권상황이 개선되었으며 특히 노동 여성 환경 분야 등에서는 괄목할 정도로 신장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군 고문치사사건 주임검사였던 신한국당 安商守(안상수·변호사)의원은 『인권상황이 현저하게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87년 당시 피의자들을 접견하면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듣는 경우가 허다했으나 지금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의 인권상황이 완벽한 것이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특히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거의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 많다. 尹鍾顯(윤종현)변호사는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인권상황은 많이 다르다』며 『철야수사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행해지고 보도되는 것이 우리의 인권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홍변호사는 『6월 항쟁이 인권운동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며 『그런 점에서 6월 항쟁은 미완의 혁명이며 우리는 그때의 정신을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형·공종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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