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망명서 참변까지]작년에 이미 테러 예감

  • 입력 1997년 2월 16일 19시 53분


[이병기 기자] 『신문은 괜찮지만 TV에 제 얼굴이 나가면 성질급한 김정일이 특수요원을 보내 저를 암살할지도 모릅니다』 작년 2월 성혜림일가 망명사건이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씨는 당시 취재기자에게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이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어려서부터 김정일과 함께 살아온 그였기에 불같은 김정일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알던 이씨였다. 『김일성이 죽은 이후 김정일을 제어할 사람은 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었다. 이씨의 어머니 성혜랑씨 역시 아들의 신변을 걱정해왔다. 91년말 성씨는 한영씨와의 전화통화에서 『돈이 없다고 잘못되는 걸 각오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아라. 꼭꼭 숨어 있어라』며 이씨의 안전을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자의 예측이 뒤늦게 사실로 맞아떨어지고 말았다. 특히 이씨는 망명후 미국에서 은신중인 것으로 알려진 어머니 성혜랑씨와의 만남을 학수고대하던 중 이같은 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이씨의 망명사실은 14년간 당국에 의해 숨겨져 왔다. 이씨의 안전문제도 고려하고 김정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당국의 배려였다. 그만큼 이씨가 가진 정보가 예민했다는 증거다. 이씨는 이름을 「리일남」에서 「이한영」으로 개명하고 성형수술까지 할 정도로 자신의 신분노출을 피해왔다. 이씨는 망명직후 서울고덕동 주공아파트를 특별분양받아 살면서 지난 84년3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다른 귀순자보다 특별대우를 받은 이씨였지만 남한생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이씨 스스로 자신이 남한의 「오렌지 족」에 해당하는 북한의 「놀새족 원조」라고 반농담삼아 말했듯이 북에서도 워낙 특별대우를 받은 이씨는 대학생활동안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씨가 어느정도 남한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졸업후 한국방송공사 국제국 러시아방송 PD로 일하면서부터. 그는 87년말 당시 모델이던 부인을 만나 결혼을 했다. 90년 방송공사를 퇴직한 이씨는 조합주택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이러다가는 금방 재벌이 될줄 알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으나 이씨는 법정분쟁에 휘말려 업무상횡령혐의로 구속돼 서울구치소에 감금됐다. 이씨는 94년1월 무죄로 석방된 뒤 정보당국과 심각한 마찰을 빚게됐다. 「평범하고 착실한 생활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당국과 「북에서의 로열 패밀리생활도 계속하고 자유도 얻고자 하는」 이씨와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 이후 이씨는 당국의 충고를 무시하고 각 언론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자신의 인생 스토리 자체를 상품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성씨가 망명하면서 이씨는 일제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반인에게도 알려졌고 자서전 출간이후에는 자신이 꺼려하던 방송출연까지 하게 되었다. 이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한 나를 믿고 결혼한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도 마음을 잡고 살아야겠다』며 한러무역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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