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일가]입국機內 스케치

  • 입력 1996년 12월 9일 21시 46분


9일 오후2시(현지시간 오후1시) 홍콩을 출발, 서울로 향하는 대한항공 618편 기내에서 김경호 최현실씨부부 일가족은 시종 긴장된 표정으로 말을 아꼈다. 지난 10월26일 자유와 빵을 찾아 북한을 탈출한지 44일째. 임신중인 딸과 아직도 젖을 떼지 않은 손녀까지 데리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홍콩까지 장장 4천여㎞에 달하는 중국본토를 종단하는 「대장정(大長征)」끝에 마침내 자유를 찾은 사람들치고는 너무 말이 없었다.機內서 계속구토 45년간의 북한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자유를 찾은 안도감과 앞으로 전개될 낯선 서울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서일까, 모두들 심란한 표정이었다. 기자들이 『소감이 어떻습니까』라고 연거푸 물어봤지만 김씨는 손으로 아픈 목을 가리키며 「아무말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 말없이 창밖만 응시했고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특히 북한탈출에 얽힌 이야기에는 전혀 입을 열지 않아 동승한 관계기관원들로부터 사전에 함구하라는 지시를 받은 듯 했다. 부인 최씨는 몸이 좋지 않은 탓인지 계속 남편에게 기댄 채 기자들의 질문에 아예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가끔 남편과 귓속말을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큰딸 내외가 북한 원산에 남았기 때문에 자녀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인 둘째딸 명실씨는 소감을 묻자 『서울 생활이 어떨지를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나중에 서울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특히 임신한 몸으로 탈출, 관심을 모았던 막내딸 명순씨는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비행기에서 계속 구토를 했다. 특히 여자 어른들은 화장실을 계속 들락거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달랐다. 처음에는 어른들이 느끼는 긴장감과 낯선 환경에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30분 정도 지나자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석에 붙어있는 헤드폰을 꺼내 귀에 대보기도 하고 기내식에서 나온 포크를 꺼내 연신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셋째딸 명숙씨의 아들인 박현철군은 헤드폰을 듣다가 영어방송이 나오자 『조선말소리 해줘요』라고 어머니에게 큰소리로 요청하기도 했다.아이들 신기한듯 이들은 비행 도중 계속 어머니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기도 했고 그래도 심심해지면 말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품에 교대로 안겨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이기도 했다. 이런 이상한 침묵과 조심스러움은 비행기가 홍콩국제공항을 이륙한 지 두시간반이 지난 오후4시반경 자신들의 탈북소식을 다룬 기내 TV방송이 나가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셋째 사위인 박수철씨가 먼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이어 옆에 있던 부인 명숙씨가 눈물을 훔쳤고 나머지 가족들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특히 김씨 부부가 감회가 깊은 듯 눈물이 많았다. 옆에서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채 울음을 터뜨리는 어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울어서 불안감이 가신 탓일까. 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던 막내딸 명순씨도 『뱃속의 아기가 건강하냐』고 묻자 두손으로 임신 7개월째인 배를 감싼 뒤 『건강하다』고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김포공항에 착륙하기 직전인 오후 5시10분경. 어디선가 『한강이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들리자 김씨부부를 포함해 모두가 창밖을 향했다. 특히 창가에 앉아있던 김씨는 중풍 때문에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부인의 도움을 받아 창가를 쳐다봤다. 아래에는 한강이 펼쳐져 있었다. 오후 5시17분경 김포공항에 안착했다는 기내방송이 나오자 이들의 탑승사실을 알고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서 이들의 탈북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상념에 잠기는 모습이었다. 목숨을 건 지난 44일 동안의 대장정이 3시간17분에 걸친 비행으로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대한항공 KE618기내에서〓孔鍾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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