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백‘○○인은 10일간에 3차례 ○군과 교전하여 모두 실패하였으니 그 무기는 가련하고 그 장교는 무경험하였다. 제1전에 ○군은 ○군의 대장까지 합하여 600여 군병을 살육하고 200여 명을 포로하였다.’동아일보 1920년 9월 20일자 1면에 실린 칼럼의 첫 부분입니다. ○으로 표…
플래시백- 언제부터 독립운동을 하려 했느냐?“일한 병합 당시부터다.”- 어찌해서 그 같은 생각을 하게 됐나.“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니 조선 사람이 통치해야겠소. 모든 걸 빼앗긴 우리에게 무슨 행복이 있겠소. 우리는 행복한 생활을 위해 독립을 요구하오.”7, 8개월 동안이나 철창에 …
플래시백1920년 8월 24일 조선을 방문한 미국 의원단의 일정은 철저하게 통제됐습니다. 1박2일의 짧은 방문인데다 첫날은 밤에 도착해 경성을 둘러본 시간은 25일 하루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조선총독부와 창덕궁 비원 의학전문학교 공업전문학교 등 일제가 안내하는 곳만 따라다녀야 했죠. …
플래시백‘100년 신문’도 몇 안 되지만, 100년을 이어온 신문 고정코너는 더욱 보기 힘듭니다. 독자가 외면하면, 수시로 단행하는 지면개편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동아일보에는 ‘100년 코너’가 두 개나 있습니다. 일전에 소개했던 ‘휴지통’과 오늘 전해드릴 ‘횡설수설…
플래시백1920년 8월 24일 경성의 하늘은 맑았습니다. 가을에 접어드는 입추(立秋)와 더위가 그치는 처서(處暑)가 지나 한숨 돌리는 때였죠. 하지만 경성은 건드리면 터질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곳곳에서 칼과 육혈포로 무장한 일제 경찰이 눈을 번득였고 기마대와 차…
플래시백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울분은 이국땅 유학생들도 매한가지였습니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독립을 선언해 3·1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고,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인 1920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국 순회강연회를 엽니다. 참뜻은 ‘세계 개조(…
플래시백류종열(柳宗悅·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참 힘듭니다. 흔히 일본의 민예연구가이자 미술평론가라 하지만 철학, 과학, 종교, 역사, 사회심리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습니다. ‘동아플래시100’ 코너에서 소개했던 국내 첫 서양음악회의 …
플래시백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4일자부터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시리즈를 실었습니다. 6월 4일자에 19회로 끝낸 장기 기획기사였습니다. 한 해 전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시정을 펼친다고 한 말을 검증한 기사였죠. 일시동인…
플래시백‘이 음악회는 도처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으며 경성의 유식계급, 그 중에서도 청년사회에서는 많은 호기심과 반가운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건이었다.’ 소설가 겸 언론인이었던 우보 민태원이 1921년 ‘폐허’에 발표한 단편소설 ‘음악회’의 한 대목입니다. 일제의 억압과 질곡으로 피…
플래시백‘오늘날 조선 기성세대들은 썩어빠진 과거숭배 사상과 천한 허영심으로, 후배를 기르고 이끄는 데는 아주 짜고 선배를 떠받드는 데는 매우 넉넉할 뿐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7일자 1면에 실린 사설의 한 구절입니다. 제목은 ‘조선 부로에게 고함’으로 ‘조선 기성세대에게 알린…
플래시백3·1운동 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과거 무단정치의 상징인 헌병의 상당수를 경관으로 옷을 갈아입혔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국 방방곡곡에 경찰서와 파출소, 주재소를 크게 늘려 조선 민중을 감시하고, 수탈했습니다…
플래시백3·1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1919년 9월 2일, 일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경성 남대문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역이 생기기 이전 단층의 초라한 역사였죠. 사이토가 귀빈실에서 각국 영사, 식민지조선 귀족, 총독부 관리 등과 인사를 나눈 뒤 쌍두마차에 올라탄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