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살아도 차별 죽어도 차별, ‘조선인 차별’ 생생 고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31일 11시 40분


코멘트

1920년 06월 04일


플래시백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4일자부터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 시리즈를 실었습니다. 6월 4일자에 19회로 끝낸 장기 기획기사였습니다. 한 해 전 부임한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천황의 뜻을 받들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시정을 펼친다고 한 말을 검증한 기사였죠. 일시동인은 ‘모두를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외친 ‘평등의 정치’를 10개월 동안 얼마나 잘 했는지 따져보겠다는 의도였죠. 구체적인 항목을 하나하나 볼까요?

차별을 없앤다면서 총독부 고위관리인 고등관에는 조선인을 새로 뽑지 않았습니다. 전부터 있던 사무관 2명 말고는 조선인 고위관리는 없었던 것이죠. 조선 사람이 일본어를 잘 배운다고 입만 열면 떠들면서 총독부에 조선인 통역관은 전무했습니다. 조선말도, 조선예식도 모르는 일본인이 조선왕가 제사과장을 맡아 제사를 빼먹었는데도 태평일 뿐이었죠.

사이토는 하위관리인 판임관 봉급령을 고쳐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최대 4배 많던 월급을 조정했습니다. 그런데 봉급을 조금 올린 대신 등급을 깎아버렸습니다. 5급이던 조선인을 8급으로 낮췄으니 전에 부하였던 일본인이 졸지에 상사가 돼버렸죠. 기자는 “한 손에 떡을 주며 아이를 달래면서 다른 손으로는 뺨을 때린 격”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더구나 본봉 차이는 줄었다고 해도 체재료인 가봉이나 사택료, 관사 등은 일본인만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해 모두 합하면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평균 2배 더 받은 셈이었죠. 일본인은 지식과 하는 일이 많다, 생활수준이 높아 생활비가 많이 든다, 고향에 돈을 보내야 하고 외지에 나와 일하지 않느냐, 라고 변명했습니다. 사이토는 임시수당지급규칙을 새로 만들었지만 판임관 최고등급 수당은 일본인이 49원 올랐을 때 조선인은 8원 인상에 그쳤고 최하등급 수당은 일본인이 19원 올랐으나 조선인은 4원 늘었을 뿐입니다.

총독부 관리만 차등이 있었을까요? 청원순사 월급은 일본인이 56원 선, 조선인은 31원 선이었습니다. 요즘 시세로 일본인은 월 280만 원, 조선인은 155만 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아래로 내려가 일용직을 보면 가장 낮은 급여가 조선인은 50전인 반면에 일본인은 1원 이하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총독부의 차별 정치는 사회 곳곳에 차별 정서를 퍼뜨렸습니다. 경성부에서는 연고가 없는 사망자가 생기면 일본인은 관을 짜서 매장을 해줬지만 조선인은 거적으로 싸서 묻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생전에 차별을 받는 것도 철천의 한이 되는 판에 죽은 뒤에까지 차별을 당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는가”라고 울분을 토합니다. 전차를 운영하던 경성전기회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차에 치여 숨진 일본인에게는 조위금 200원을 지급했지만 조선인에게는 절반인 100원만 주고 말았습니다. 기자는 “조선사람 장례비는 일본사람의 절반밖에 들지 않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럼 사회적 발언권이 있는 변호사들은 달랐을까요? 합병 뒤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제1변호사회와 조선인만 참여한 제2변호사회가 있었습니다. 법원 요구로 두 변호사회를 하나로 합친 뒤 임원 선거를 치렀습니다. 조선인 변호사 수가 많아 박승빈 변호사가 회장으로 선출됐죠. 일본인 변호사들은 덮어놓고 ‘조선인 회장은 안 된다’고 거부해 다시 선거를 해야 했고 그 결과 일본인이 선출됐습니다. 임기가 끝나 다시 선거를 하자 이번엔 조선인 장도 변호사가 회장이 됐습니다. 그러자 일본인 변호사들이 또 들고 일어나 결국 변호사회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학식이 떨어지는 조선인 변호사 밑에서 일하는 것은 일본인 변호사의 치욕이다, 조선인 회장은 관청이나 일본인을 상대하기 힘들다며 차별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학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10여 곳을 제외한 모든 학교의 교장 자리를 일본인이 독차지했습니다. 교내의 중요한 결정은 일본인이 다 하고 조선인 교사는 들러리만 설 뿐이었죠. 같은 교사이지만 일본인은 조선인보다 2배 많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일본인 교사가 ‘일시동인’이니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차별이 없다’느니 입이 닳도록 떠든들 어린 학생들이 곧이듣겠느냐”고 기자는 따져 물었습니다.

학생들로 시선을 돌리면 일본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고등학교 7년), 대학교 3, 4년 교육을 받지만 조선인은 보통학교 4년, 고등학교 4년, 전문학교 3년이 고작이었습니다. 일본인은 17년까지 받는 교육을 조선인은 11년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조선인 학생은 고등학교에까지 수공과를 두어 수업시간에 바구니를 짜고 짚신을 삼게 했습니다. 영어는 필수과목도 아니었죠. 총독부는 조선인도 학력이 일본인과 같으면 관리로 채용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는 “문을 닫아걸고 너도 들어오면 문안에 있는 사람과 같이 대접을 한다”고 하는 말고 다를 바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주거환경에도 차등이 있었습니다. 경성에서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청계천 남쪽 남촌에는 공원도 많고 가로등도 넉넉해 골목길이 환했지만 조선인들이 주로 사는 북촌은 탑골공원 하나 뿐에 길은 좁고 어두웠습니다. 게다가 남의 집 앞에 수십, 수백 개씩 똥통을 늘어놓는 것도 북촌에만 있는 행태라고 비판했습니다. 임야는 일본인에게만 빌려주고 논밭도 일본인에게만 25년 분할상환을 할 수 있게 하는 등 차별 대우는 줄을 이었습니다.

기자는 최종회에서 대안을 제시합니다. 실력양성이 해결책이었습니다. ‘눈앞의 차별을 한탄하기보다 돌아앉아 나의 힘을 기르는 것이 하대를 당하지 않는 제일 가까운 길이고 제일 튼튼한 방법이며 제일 이익이 되는 계획’이라는 것이었죠. 그래야 어느 분야에서든지 일본인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가 나가는 동안 ‘억울한 차별대우의 경험담’ 투고를 받아 ‘독자의 소리’로 게재했습니다. 독자와 쌍방향 소통을 한 것이었죠. 독자들의 울분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면서 실력양성의 각오를 다지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