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 학원에 뒷돈 받고 ‘문항 장사’한 교사 27명 수사요청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3월 11일 1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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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1/뉴스1
2023.6.21/뉴스1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과 모의평가 출제에 참여한 고등학교 교사들이 최신 수능 출제 경향을 반영한 예상 문항을 만들어 사교육 업체들에게 수억 원의 뒷돈을 받고 판매한 사실이 감사원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이들은 수능과 모의평가 출제 경험이 있는 동료 교사들을 모아 ‘문항 공급조직’ 까지 꾸려 학원에 판매할 문항을 만드는 등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교사가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교사의 영리 업무 겸직을 금지한 국가공무원법과 사립학교법을 정면 위반한 행위로 감사원은 보고 있다.

감사원은 사교육업체에 문항을 만들어주고 대가로 금품을 받은 현직 교사 27명에 대해 청탁금지법위반 혐의 등으로 경찰에 수사 요청했다고 11일 밝혔다. 학원에 문항을 만들어 팔면서 동시에 수능이나 모의평가 출제진 등으로 참여한 교사들에게는 업무방해 및 배임수재 혐의도 적용됐다. 현직 교사들로부터 문항을 사들인 사교육 업체 관계자 23명도 수사요청 대상에 포함됐다.

● 현직 교사 35명 포함된 ‘피라미드식 문항공급 조직’ 만들어
감사원에 따르면 사교육업체에 문항을 판매한 교사들은 동료 교사들을 포섭해 ‘문항공급 조직’을 꾸린 뒤 조직적으로 학원에 판매할 문항을 만들었다. 수능이나 모의평가 출제 경험이 있는 교사가 ‘알선책’ 역할을 하면서 사교육 업체와 거래를 알선하고 수억 원의 수수료를 챙겼고, 그 아래 다수의 교사들은 수능 문항과 비슷한 문항을 만들어 공급하는 식이었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피라미드식 조직화”라고 설명했다.

수능이나 모의평가 검토위원으로 여러 차례 참여했던 한 고등학교 교사 A 씨는 출제진 합숙 과정에서 알게된 동료 교사 8명을 포섭해 ‘문항 공급 조직’을 꾸렸다. A 씨는 2019년부터 2023년 5월까지 사교육 업체에 예상 문항 2000여 개를 만들어주고 총 6억6000만 원을 수수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직의 수장 역할을 했던 A 씨가 알선비와 문항 제작비로 2억 7000만 원을 챙기고, 나머지 8명이 3억 9000여 만 원을 나누는 식이었다.

현직 교사 B 씨는 A 씨의 ‘문항 공급 조직’에 장기간 참여하면서 그 기간 동안 평가원에 파견돼 수능과 모의평가 출제위원으로 5차례나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최근 3년 간 상업 수험서를 집필한 경험이 있느냐”는 평가원 측의 질문에는 모두 “없다”라고 거짓 답변했다고 감사원은 전했다.

고등학교 교사 C 씨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출판업체’를 설립하고 동료 교사 35명을 모아 본격적인 ‘문항 거래 사업’에 나섰다가 적발됐다. EBS 교재 집필 경력이 있는 C 씨는 2018년부터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만들어 팔다가 2019년 6월부터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법인을 차려 본격적인 사업에 나섰다. 이 교사는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팔아 18억 9000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현직 고등학교 교감이 ‘문항제작팀’을 꾸려 사교육 업체에 문항을 판매하고 9200여 만 원을 챙긴 사례도 적발됐다.

● 학원에 판 문제 그대로 학교 내신에도 출제
사교육업체에 문항을 판매한 현직 교사들이 이 문항을 소속 학교의 내신 시험에 그대로 ‘돌려막기’식으로 출제한 사실도 이번 감사에서 드러났다. 일부 학생들이 학원에서 풀어봤던 문제가 그대로 내신에도 출제된 것. 한 고등학교 교사는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온라인 사교육업체에 내신 예상 문제 7000개를 만들어 판매하고, 이중 8개를 소속 학교 시험에 그대로 출제했다.

EBS 수능연계 교재 집필진으로 참여한 교사들이 출간되지 않은 교재 내용을 미리 빼내 학원에 판매하고 대가를 챙긴 사례도 적발됐다. 2015년부터 EBS 수능연계 영어교재 집필진으로 참여했던 한 고등학교 교사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시중에 출간되지 않은 EBS 교재를 무단으로 변형해 문항 8000개를 강사에 공급한 뒤 대가로 5억 80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감사원은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거나, 비위 정도가 심각한 교사들에 대해 우선 수사요청했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은 사교육 업체를 상대로 문항 거래를 한 교사 200여 명에 대해 추가로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 또 “수능 경향에 맞춘 양질의 문항을 공급받으려는 사교육 업체와 금전적 이익을 원하는 일부 교원 사이에 ‘문항거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수사요청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다수 교원에 대해서도 감사위원회 의결을 거쳐 엄중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전했다.

● ‘일타강사’ 지문과 똑같은 수능영어 23번 지문 감사결과도
감사원은 2023학년도 수능 영어 23번 지문이 대형 입시업체 소속 일타 강사의 사설 모의고사 지문과 똑같았다는 ‘판박이 지문 의혹’에 대해서도 감사 결과를 밝혔다. 앞서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은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저서 ‘투머치 인포메이션’의 특정 단락이 일타 강사의 교재와 수능,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EBS 교재 초안에 나란히 실려 출제 경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졌다. 이 문제들은 모두 인용된 지문은 같았지만 문항은 달랐다.

해당 문제를 수능에 출제한 대학교수 D 씨는 2022년 8월 EBS 수능연계 교재를 감수했는데, 이 교재에는 ‘투머치 인포메이션’을 지문으로 활용한 문항이 포함돼있었다. 이 문항은 현직 고등학교 교사 E 씨가 출제한 것이었다. 교수 D 씨는 2022년 10월 수능 영어 출제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투머치 인포메이션’ 지문을 무단으로 사용해 수능 23번 문제를 출제했다. “교재 집필 중 알게된 사실을 유출해선 안된다”는 EBS 보안서약서를 어긴 것. D 씨가 감수한 EBS 교재는 23년 1월 출간될 예정이었다.

이 지문은 대형 입시학원인 메가스터디의 유명 강사 F씨가 22년 9월 모의고사로 발간한 문제집에도 실려있었다. F씨는 평소 EBS 교재 집필 경력이 있는 고교 교원 G 씨에게 문항을 공급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은 강사에게 문항을 제공한 고등학교 교원 G 씨와 이 문항을 EBS 교재에 최초 출제했던 교원 E 씨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뒤 경찰에 출제 경위를 명확하게 규명해달라고 수사를 요청했다.

수능을 주관하는 평가원은 유명 강사의 사설 모의고사 문제집에 실린 문제 지문이 수능 문제로 출제됐다는 사실을 사전에 파악하지 못했다. 평가원은 수능 문항을 확정하기 전 사설 모의고사와의 중복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 F 강사의 모의고사를 계속 구매해왔지만 2022년에만 F 강사의 모의고사를 구매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평가원 담당자들은 이 문항에 대해 215건의 이의신청이 접수됐지만 수능 출제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해당 안건을 아예 이의심사위원회 심사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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