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전 국정원장 회고록, DJ 때의 남북정상회담 ‘선물’ 드러내 화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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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끌었던 국내 회고록들
김만복 회고록 기밀 담겨 판금… “개인 기억 의존 사료적 가치 낮아”

“어차피 극우적 프리즘을 갖고 현장에 있었고, 극우 프리즘으로 대통령에게 조언했던 게 분명했던 것 같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에 대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9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해 이같이 말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부터 지난해 6월 말 남북미 판문점 회동까지 약 1년 반 동안의 외교 기밀을 담은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에 야당이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등 파문이 일자 외교부 수장이 직접 나서 작심 비판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북핵 외교 비사를 풀어낸 회고록들이 적지 않았다. 이번 ‘회고록 파문’은 미국발(發)이었지만 한국의 전직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낸 회고록 일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미, 남북 관계의 이면을 들춰내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다.

남북 관계의 비사를 다룬 여권 인사들의 대표적인 회고록으로는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피스메이커’(2008년)와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칼날 위의 평화’(2014년) 등이 꼽힌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중책을 맡았던 이들의 회고록에는 조지 W 부시 미 정부에서 국무부 차관,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볼턴 전 보좌관과 현 여권 외교안보 라인의 악연을 유추할 수 있는 일화들도 담겨 있다.

임 전 원장은 ‘피스메이커’에서 볼턴을 “대북 적대 발언을 일삼아 온 (인물)”이라고 규정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볼턴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 프로그램 정보를 우리 정부에 알리기 위해 2002년 서울을 찾았던 일을 회상하며 “(그의) 정치적 판단에 신빙성을 부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겨냥하기도 했다.

임 전 원장은 뒤이어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북한에 파견됐을 때를 회고하며 “(백악관) NSC가 대화 요지를 마련했으나 볼턴과 국방성 그리고 (딕) 체니 부통령이 좀 더 강경한 입장을 (북한에) 통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적었다. 제네바 합의를 폐기하고 2차 북핵 위기를 몰고 온 책임이 볼턴에게 있다고 적시한 것이다.

이 전 장관은 회고록에서 “(볼턴은) 미국 네오콘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강경파”라고 적고, 2004년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핵물질 추출 실험이 일어나 한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 회부될 뻔했던 일을 기록하며 “(한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주도하는 나라는 미국이었으며 그 중심에 볼턴 국무부 군축차관이 있었다”라고 비판했다.

현금 지원 등 무리한 요구를 해온 북한과 남북 정상회담 성사 등 정치적 성과를 앞세우는 한국 등 남북 관계의 이면을 드러낸 대목들도 있다. 임 전 원장 회고록에는 1차 남북 정상회담 전 북한의 현금 지원 요청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요”라며 “박지원 특사께서는 이번 정상회담 선물로 우리가 현금 1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마지막 협상에 임하도록 하세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2004년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 방북과 관련해 “북한은 한국 정치인들이 방북 일정이나 성과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한다는 약점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기밀 유출 논란을 일으킨 볼턴의 회고록처럼 김만복 전 국정원장은 2015년 회고록 ‘노무현의 한반도 평화구상’을 내고 남북 관계 비사를 공개했다가 책이 판매 금지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정원이 업무상 비밀 누설 등을 문제 삼아 판매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낸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이 책에는 정부가 ‘남북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는 내용 등이 담겼었다. 최근 출판된 회고록 중 단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다. 송 전 장관은 책에서 정부가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문제를 두고 북한과 협의했다는 내용을 적어 정치적 폭풍을 몰고 왔다. 정부 내에서 찬반이 갈리자 “문재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 일단 (북한의 의견을) 남북 경로로 확인해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적은 것. 현 여권은 당시 강력하게 내용을 부인했고, 이는 고발로까지 이어졌다.

다만 일각에선 한국의 독특한 회고록 문화 때문에 더 신중하게 접근해 읽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부 교수는 “(한국 회고록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쓰여진 게 많다. 안타깝지만 사료적 가치가 높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고 말했다. 미국 회고록의 경우 실제 기밀해제 허가를 받은 자료를 기본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이는 성향이 강한데, 이 점이 한국에서 발간되는 것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이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국내 회고록#임동원#피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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