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박정훈]박근혜·트럼프의 비정상회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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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미안했다. 19일 시국선언을 하겠다고 미국 조지워싱턴대 캠퍼스에 모여든 대학생들. 한 여학생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거 하면 취업 안 된다고 해 걱정이 많았지만 중국 친구까지 ‘한국 민주주의는 가짜 아니냐’고 묻는데 안 나설 수가 없더라고요. 그분, 이제 좀 물러났으면 좋겠어요.”

울컥했다. 중국인한테까지 민주주의를 얕잡아 보인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었다. 워싱턴 근교에서 음식점을 하는 한 교민은 “30년간 미국에 살면서 이리 창피한 적은 없었다. 우린 그 사람 허상만 보고 뽑았다”고 분노했다. 재작년 신년 보고에서 “진돗개 정신으로 비정상을 정상화하자”고 했던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비정상의 수렁으로 끌고 들어갔다.

부끄러웠다. 최태민 최순실…. 정치인 박근혜에게 그들의 영향력이 작지 않다는 수군거림. 누구든 그 이름을 면전에서 거론하려면 불이익을 각오해야 했다. 정치권에서 그들의 이름은 ‘저주의 씨앗’이었다. 채널A에서 ‘뉴스TOP10’을 진행하면서 나름 그림자 실세 의혹을 파헤쳤지만 실체에는 근처도 못 갔다. 오랜 세월 지겹도록 들었던 베일 속 이름들, 분탕질이 도를 넘은 뒤에야 그들의 힘을 알게 됐다.

당황스러웠다. 국민 100명 중 95명이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 헌법상 정상(頂上)이지만 정상(正常)이라 할 수 없는 대통령. 그런데 정상회담 얘기가 흘러나왔다. 가장 중요한 우방의 새 대통령과 만남이 추진될 수 있다는 거였다. 워싱턴에서 트럼프 당선인 측근을 만나고 돌아간 조태용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정상 간 만남이 이뤄지는 게 좋겠다는 미국 측 말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입에서 우리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은 굴뚝같지만 회담을 요구할 때가 아니라는 뉘앙스였다.

트럼프는 바보가 아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신문과 방송 뉴스를 꼼꼼히 본다. 미 언론은 이제 대놓고 한국을 후진국으로 묘사한다. 워싱턴포스트는 “한국병이 또 도졌다”며 “박 대통령이 물러날 확률은 70%”라고 보도했다. 물러날 대통령과 정상회담이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영수회담 헛발질과 계엄령 발언으로 박 대통령의 기력 회복에 도움을 줬다지만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화타와 편작을 동시에 만나는 격이다. 인사 참사로 지지율이 흔들릴 때마다 외국에서 점수를 땄던 대통령 아니던가.

공짜가 있겠나. 정상화되기 힘든 정상과 만나주는 건 이문이 없는 장사다. 트럼프가 만나줄 때는 방위비 분담금 증액,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을 공식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테이블 밑에서 내미는 천문학적 액수의 무기 구매 요청서까지 각오해야 한다. 트럼프를 싸구려 장사치로 보고 내심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길 바랐던 게 우리 정부 아니던가.

“박 대통령의 고집이 안보 불안의 몸통이다.” 이 말을 한 야당 의원의 자격은 논외로 쳐도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정상은 한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트럼프와 서둘러 만나야 한다. 미국이 어떻게 한국 덕을 보고 있는지, 양국의 관계가 서로에게 얼마나 이익인지 제대로 각인시켜야 한다. 백날 측근들 만나고 다녀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트럼프를 만난 것처럼 효과적일 순 없다. 워싱턴 외교가에 내려진 ‘정상회담 언급 금지령’은 대한민국 외교의 슬픈 자화상이다.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짓밟힌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후퇴한 민주주의를 되살리고 무너진 시스템을 복원할 수 있는, 그리고 국민에게 새 희망을 줄 수 있는 진짜 정상이 트럼프와 당당하게 마주 서야 한다. 비정상회담으로는 안보든 동맹이든 정상으로 만들 수 없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
#박근혜#시국선언#최태민#최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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