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진의 오늘과 내일]검찰 앞에 다시 선 기업 총수를 보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박현진 산업부장
박현진 산업부장
 광화문 일대를 덮어버린 ‘촛불의 바다’가 신문 1면을 장식한 14일. 집회 사진과 함께 눈길을 끈 또 다른 사진이 있었다. 10시간이 넘는 검찰 조사를 마치고 새벽에 귀가하는 대기업 총수들의 모습이었다. 눈을 감고 승용차 뒷좌석에 몸을 기댄 모습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차양으로 철저히 모습을 가린 장면까지 고스란히 앵글에 잡혔다. 차양에 비친 한 총수의 흐릿한 실루엣은 문득 ‘2002년 차떼기 사건’에 얽힌 장면들을 떠올리게 했다.

 주요 그룹 총수들이 잇달아 검찰 청사에 출두한 것은 2004년에 이어 12년 만이다. 당시 기업의 고위 경영진과 총수들은 ‘2002년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돼 무더기로 불려 나왔다. 2002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기업으로부터 현금 트럭을 넘겨받는 수법으로 823억 원의 대선자금을 챙긴 이 사건은 정경유착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시 ‘차떼기 당’으로 불리며 지지율이 급락하던 한나라당을 구한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이다. 2004년 ‘4·15 총선(17대)’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표에 오른 그는 불법 대선자금 모금을 국민에게 사죄한다는 취지로 천막으로 당사를 옮겨 선거를 치렀고 선방했다. 천막당사 2주년을 맞아서는 ‘초심을 잊지 않겠다’는 신문광고까지 일제히 게재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그때의 초심을 잊은 것일까. 좋은 취지의 국정(國政)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기업의 협조를 구했다고 밝혔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선 또 다른 형태의 정경유착으로 비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최순실의 농단에 놀아났다는 의혹까지 구체화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과거 ‘차떼기 사건’에 비할 바가 아니다. 14일 여야가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한 특별검사제까지 합의하면서 대통령과 최순실, 그리고 기업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수사 결과에 따라 총수의 기소 여부가 갈릴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도 좌불안석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정권에서 요청하는데 거부할 수 있는 기업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한다. 특검에서 총수들을 다시 부를 것을 우려하면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데 기업 흔들기가 도를 넘고 있다는 불만도 높다. 재계가 피해자라는 목소리에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정권의 대기업 모금의 관행이 앞으로도 계속될 수는 없다.

 과거 정경유착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나 기업들이 내놓았던 ‘투명경영 선언’ 정도의 보여주기 이벤트로는 더 이상 곤란하다. 차떼기 사건으로 인해 정치자금법 개정이 이뤄졌듯이 이번 사태를 거울삼아 법제도적인 진전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지정기부금단체 관련 법안을 손보겠다는 움직임은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지정기부금단체가 기업한테 받은 기부금의 내용 및 사용 명세, 사업 결과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한다는 것이 골자다. 청와대나 정부가 기업에 함부로 손을 벌릴 수 없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셈이다. 이번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자금을 출연한 기업 가운데 이사회 의결을 거친 곳은 단 두 곳이다. 만약 이런 장치가 법제화된다면 기업의 내부 감시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전경련의 개혁도 그냥 넘어갈 과제가 아니라는 것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 없이 되풀이되는 잘못된 과거는 결국 역사의 퇴보일 뿐이다. 혼돈스러운 현 정국이 수습된 뒤 정권과 대기업의 부적절한 공생 관행을 수술해야 한다는 범(汎)사회적인 의지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 기업과 정권이 진짜 함께 사는 길이다.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광화문 촛불 시위#대기업 총수#박근혜#정경유착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