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정자]1950년 6월 29일,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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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한 신생국에서 터진 전쟁, 美 신속지원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국을 아는 老대통령 이승만 “맨주먹으로 싸운다”는 병사들… 한국이 맥아더를 감동시켰다
애국심이 조롱당하는 현실, 나라 지킨 영웅들 돌아봐야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마치 쿠르베의 그림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처럼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은 시골길 논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미국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와 한국의 최고통치자 이승만의 이야기다.

북한의 기습 공격을 받은 지 나흘 만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는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일본 도쿄에서 수원으로 날아왔다. 구름이 낀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적의 치열한 공격을 받은 수도 서울은 이미 이틀 전에 함락됐다. 바탄호는 방금 적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아 파괴된 수송기들이 내뿜는 기름 냄새와 연기를 뚫고 서울 남쪽 20마일 지점에 있는 수원에 착륙했다. 비행기가 착륙하는 동안에도 간이 활주로는 북한의 소련제 아크 전투기에서 퍼붓는 기총소사와 폭탄의 포연으로 자욱했다.

임시수도 대전에서 이륙한 이승만의 비행기도 적 항공기를 피해 저공비행으로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수원으로 왔다. 태평양전쟁의 영웅이자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백전노장 맥아더는 70세, 이제 막 나라를 세운 지 2년 만인 평생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75세였다. 아직 포탄 세례를 받지 않은 논의 벼들은 무심하게 푸르렀다. 야전 사령관 맥아더가 서 있는 곳은 하필 논바닥이었다. 이승만은 의례적 인사말을 건네기도 전에 다급하게 “장군, 조심하세요. 귀하의 신발이 못자리를 밟고 있군요”라고 말해야만 했다.

북한 비행기들이 계속 기총소사를 퍼붓는 가운데 두 사람은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과대학으로 들어가 강의실 한 귀퉁이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사태를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준비가 갖추어지는 대로’ 미국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줄 것을 약속했다.(‘6·25와 이승만’·프란체스카 지음)

국민의 지적 수준이 높아져 바깥 세상에 대한 문리(文理)가 트인 요즘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아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초(超)저개발의 신생 국가에서 불시에 전쟁이 터졌을 때, 영어에 능통하고 서양 학문과 관습에 대한 고도의 이해를 가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미국의 신속한 지원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이승만과의 면담을 끝낸 맥아더는 수행원 10여 명을 대동한 채, 징발한 지프에 몸을 싣고 한강으로 향했다. 한강 연변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대한민국의 방위 능력이 이미 소멸됐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한국군이 포진한 고지에 올라 한강 너머 멀리 바라보이는 남산과 그 주변을 망원경으로 한참 살펴봤다.

그러다가 한 참호를 지키고 있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는 언제까지 이 호 속에 있을 건가?” 맥아더를 수행한 김종갑 대령(시흥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이 통역을 했고, 부동자세의 병사가 또박또박 대답했다. “저희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입니다!” “명령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오, 장하다. 다른 병사들도 같은 생각인가?” “예, 그렇습니다. 각하,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알았네. 여기서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 몰랐네!”

맥아더가 병사의 손을 꼭 잡으면서 몸을 돌려 김 대령에게 말했다. “이 씩씩하고 훌륭한 병사에게 전해주시오. 내가 도쿄로 돌아가는 즉시 지원군을 보내줄 것이라고. 그때까지 용기를 잃지 말고 훌륭히 싸우라고!” 6·25전쟁 개전 초기 한국군을 총지휘했던 정일권의 회고담이다.(‘사진과 함께 읽는 대통령 이승만’·안병훈 엮음)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삽입된 이 에피소드를 누군가는 작위적 허구라고 폄하했지만, 이것은 엄연히 실화다.

도쿄로 돌아간 맥아더는 이튿날 새벽 4시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지급 전문을 보냈다. ‘한국이 당면한 최악의 위기는 미 지상군의 지원 없이는 기사회생이 불가능함을 현지 시찰로 확인했음. 재일(在日) 미8군의 보병 3개 사단이 긴급 출동할 수 있도록 재가해 주실 것을 앙망함.’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전쟁에서는 훌륭한 무기와 병력만큼이나 애국심과 전투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애국심이 한없이 조롱당하는 오늘에 와서야 우리는 깨닫는다. 죽지 않고 사라져 간 노병(老兵), 그리고 영화에 부재(不在)한 노정객이 영원히 한국인의 영웅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것도.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인천상륙작전#맥아더 장군#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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