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설득하지 않는 자, 설득당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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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가 시작된 3월 초 일부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선언)’ 카드를 꺼낼 경우의 대비책 마련을 주문했다. 북한이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자제할 테니 협상하자’고 나설 때 정부가 어떻게 할지 걱정한 것이다. 정부는 단호했다. “지금은 대화보다는 제재에 주력할 때”라는 것이었다. 정부 내에선 여전히 ‘대화’라는 단어가 거론되는 것조차 금기시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국내에서 별다른 담론이 오가지 않는 가운데 유엔의 대북 제재 한 달 만인 3일 저녁 북한 국방위원회가 ‘협상’을 언급하고 나섰다. 담화에 나온 “야만적인 제재 소동이 우리 삶의 공간을 완전히 질식시키고”라는 언급에는 중국이 실제로 참여하는 제재가 북한에 고통이 되고 있다는 하소연도 담겨 있다. 그 이면엔 충분히 고통스러우니 중국이 나서서 협상을 주선해 달라는 메시지도 담긴 듯하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공조 체제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통을 제기하면서 협상 얘기를 꺼낸 것은 북한 정권이 제재 국면에서 협상으로 출로를 마련하기 위한 움직임에 시동을 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의 한반도 정책 담당자를 만나고 온 한 인사의 언급은 그런 맥락에서 새로운 우려를 안겨준다. 그는 미국 정부가 북핵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첫째, 아무 대응을 하지 않고 북핵 문제에 대한 정책적 실패를 인정한다는 것. 둘째, 북한을 공격하는 방법인데 북핵 1차 위기 때 나왔던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타격(surgical strike)이 아닌 전면적인 대북 공격 옵션이라는 것. 두 가지 모두 현실적으로는 실행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는 평화협정 문제를 얘기하면서, 결국 협상을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한 방법이며, 실질적으로 미국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준 인사는 “정작 우려되는 대목은 미 정부가 북핵 문제에서 한국보다 중국을 더 의식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5일 “북한이 핵 활동을 동결하고 과거 핵 활동을 명확히 신고한 뒤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복귀를 허용해야만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러셀 차관보의 언급이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결렬된 북-미 2·29합의 내용과 유사하고, 대화를 위한 북한의 사전 조치를 거론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북한과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심상치 않다.

한국 정부가 대화보다 제재에 집중하자고 강조하는 것이 현재로서 옳은 방향이라는 데 누구도 이견을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옳은 방향으로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주하기엔 한반도 정세가 너무도 엄중하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모두 대화와 협상을 언급하는 순간이 올 때 한국만 제재를 고수할 수 있을까. 대화를 거론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 향후 대화를 대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떠밀려가지 않으려면 북한과의 대화를 재개하기 위한 조건과 우리의 요구사항을 세밀하게 담은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미국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설득해 북한의 핵 포기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설득하지 않는 자, 설득당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대북 제재#북한#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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