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신경식]“한국 정치사 주연만큼 빛난 大조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素石(소석) 영전에]

신경식·대한민국헌정회 회장
신경식·대한민국헌정회 회장
1970년대 초 야당 지도자 3명이 ‘40대 기수론’으로 대통령에 도전했다. 그중 2명(김영삼 김대중)이 훗날 대통령이 됐다.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나머지 한 명인 소석(素石) 이철승은 그런 주연이 못되었다. 그러나 어느 주연 못지않은 ‘대(大)조연’이었다.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 통일이라는 국가 성장의 전 과정에서 그만큼 유서 깊게 열정적으로 활동한 정치 지도자는 드물었다. 그는 이 세대에 가장 오래된 정치인이요, 그래서 가장 원숙한 정치인이었다.

건국과 호국을 위해 젊은 이철승은 목숨을 걸고 도전과 투쟁을 했다. 그의 집안은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그는 일본인 선생, 학생과 싸웠으며 일본 학병(學兵)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왔다. 6·25전쟁 때는 학련 구국대를 만들어 낙동강 전선에 참전했다.

광복 후 건국 공간에서 그는 학생운동 진영의 대표였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제2의 독립운동’, 공산 세력과의 투쟁, 자유민주 민족진영의 단결 운동에서 학생 세력의 지도자였다.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에서 그는 “애국 선배의 사랑방을 동가식서가숙하며 그분들의 애국하는 정신과 자세를 배웠다”고 썼다. 대표적인 ‘애국 선배’가 한민당 창당을 주도한 인촌(仁村) 김성수다. 인촌은 자신의 보성전문(현 고려대)에 소석을 받아주고 학생운동 지도자로 키웠다.

민주화 투쟁에서 김영삼 김대중과 다른 것은 똑같이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국가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각이 달랐다는 점이다. 소석은 ‘5·16’의 망명 피해자였지만 야당 지도자로서 박정희의 국가 안보에 협력했다. 그가 주창한 ‘중도통합론’이다.

반정부 투쟁을 하는 종교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하수도 공사요. 종교는 상수도 공사다.” 하수도에는 민주주의와 함께 국가안보도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그의 마지막 꿈은 통일이었다. 노구를 이끌고 북한 인권운동을 지원하면서 친북 세력에 맞서 애국운동의 선봉에 섰다. 헌정회의 원로회의 의장으로 지난달까지도 사무실에 나와 80대 후배들에게 ‘양평운동’을 제창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보고 평양 가서 냉면 먹을 수 있게 건강을 지키자”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서도 통일을 지켜볼 것이다. 삼가 그의 명복을 빈다.

신경식·대한민국헌정회 회장
#이철승#신민당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