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에 10대도 안 다니는 자전거도로에 1조 쏟아부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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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사업 878건 예산 낭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이명박 정부가 2009년부터 추진한 ‘자전거 인프라 구축 사업’을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로 꼽았다. 지난해 7월 폭우에 떠내려 온 부유물로 뒤덮인 강원 춘천시 북한강 자전거도로. 동아일보DB
《 전남 함평군이 국비 120억 원을 지원받는 등 총 195억 원의 예산을 들여 조성하고 있는 ‘뱀 생태공원’. 아나콘다 등 90여 종의 뱀 600여 마리를 전시하는 이 공원은 당초 2011년 8월 개장할 예정이었지만 아직 문을 열지 못했다. 지난해 7월에 전시장을 완공했지만 막대한 운영비를 조달하기 어려워서다. 운영비는 연간 1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지만 입장 수입은 1억 원에 그칠 것으로 예상돼 개장하고 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인구 3만여 명의 함평군이 이런 대규모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 예산을 따내는 과정에서 연간 예상 운영비를 절반 수준으로 축소해 보고했는데도 정부가 이를 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장이 지연되는 사이 지난해 말에는 미리 들여왔던 킹코브라와 이구아나 41마리가 폐사하면서 3억여 원의 예산이 추가로 낭비됐다. 》

국가 부채가 갈수록 증가하면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 부처들의 예산 낭비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균형재정’과 예산 절감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줄줄 새는 나라 곳간은 방치해 놓고 있었던 셈이다. 전문가들은 예비타당성 조사 등 현행 예산 낭비 감시 기능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혈세 낭비를 막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경제성 검토도 안 한 자전거 도로 사업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감사원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2012년 정부의 세입세출 결산검토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예산이 낭비된 사업들 중 상당수는 예비타당성 조사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의미다.

예비타당성 조사는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무리한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사업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으로 현행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사업비가 500억 원 이상이거나 국가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 원 이상인 건설 사업은 반드시 이 조사를 받도록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부터 추진한 ‘자전거 인프라 구축 사업’은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업으로 꼽혔다. 1조205억 원(국비는 약 40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전국 해안 주요 도시를 5820km의 자전거 도로로 연결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인데도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않았다.

특히 자전거 이용자 상당수가 도심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도심에서 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도 당시 행안부는 제대로 된 수요조사도 없이 예산 대부분을 해안 도시들을 연결하는 장거리 자전거 도로에 쏟아 부었다.

이에 따라 감사원이 지난해 건설이 완료된 14개 자전거 도로 구간의 자전거 통행량을 조사한 결과 10개 구간은 시간당 10대 이하였고, 이 중 2개 구간은 1시간에 1대도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제대로 된 사업 타당성 조사를 거치지 않고 무리하게 추진한 사업으로 수천억 원의 혈세를 날린 셈이다.

정부 부처들이 비슷한 사업을 중복으로 추진해 예산을 낭비한 사례들도 많았다. 문화재청은 2011년부터 180억 원(국비 90억 원)을 투입해 경북 구미시 성리학 관련 문서 전시시설을 세우는 ‘채미정(採薇亭) 주변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감사원 조사 결과 이 사업은 2010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228억 원(국비 160억 원)을 들여 추진하고 있는 역사문화디지털센터 건립 사업과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외풍에 무력화된 예산 낭비 감시 제도

감사원이나 국회로부터 여러 차례 예산 낭비 사업으로 지적을 받고도 계속 추진되는 사업들도 있었다. 463억 원을 들인 고용노동부의 사회적 기업 육성 사업은 지원 대상 인원을 잘못 예측해 매년 40%가량의 예산을 남겨 2011년부터 여러 차례 지적을 받았는데도 올해도 1100억 원의 예산을 배정받았다.

사업이 지연되고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예산을 지원한 사업도 예산 낭비 사례로 꼽혔다. 국산 대형 풍력발전기 수출을 지원하겠다며 2010년부터 827억 원(국비 579억 원)을 들여 ‘새만금 대형 풍력 시범단지 사업’을 추진한 산업통상자원부는 입지 선정 문제로 사업이 지연되는데도 사업 추진 지자체인 전북도에 122억 원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이 풍력 단지 사업은 결국 무산됐다.

재정건전성 악화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데도 예산 낭비 사업들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것은 이들 사업 상당수가 정부가 국정 과제로 추진하거나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들어간 사업들이기 때문이다.

임기 내 주요 사업에서 성과를 내려는 정치권의 압력으로 국가재정법 등 예산 낭비 사업을 걸러내기 위해 마련한 제도들이 무력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녹색성장을 강조했던 이명박 정부가 자전거 도로 건설 사업을 벌일 때 이를 예산 낭비라고 막아설 만한 공무원이 누가 있겠나”라며 “예산안 통과 때마다 국회의원들의 ‘쪽지 예산’ 끼워 넣기가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안창남 강남대 교수(세무학)는 “혈세가 낭비된 뒤에는 이를 보전할 방법이 없는 만큼 재정 사업에 대한 감사원의 사전 감사 권한을 확대하고 부정확한 사업성 검토에도 예산 낭비 사업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예비타당성 조사 제도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정부사업#예산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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