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서 발굴된 6·25 국군유해 첫 봉환]62년 만에 모십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 Array
  • 입력 2012년 5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17세 학도병, 34세 아빠군인, 그리고 10인의 무명용사… 北서 발굴한 국군유해 첫 봉환美, 함남 장진호 전장서 수습미군유해 섞여 美갔다가 귀환… 신원확인 2명 내달 현충원 안장

6·25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 12명의 유해가 25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C-130 수송기 편으로 도착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이 이날 봉환식에 참석해 휴전 이후 처음 도착한 국군의 유해를 최고의 예우로 맞이했다. 성남=청와대 사진기자단
6·25전쟁 당시 북한지역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 12명의 유해가 25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C-130 수송기 편으로 도착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부 장관 등이 이날 봉환식에 참석해 휴전 이후 처음 도착한 국군의 유해를 최고의 예우로 맞이했다. 성남=청와대 사진기자단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가 62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950년 12월 함경남도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한 국군 용사 12명의 유해는 공군의 C-130 수송기편으로 미국 하와이를 출발해 25일 오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북한 지역에 묻혀 있던 국군 유해가 봉환된 것은 휴전 이후 처음이다.

정부는 이날 서울공항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관진 국방부 장관, 김상기 육군참모총장,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최고의 예우를 갖춰 유해 봉환식을 거행했다. 귀환한 국군 전사자들은 6·25전쟁 당시 미군에 배속됐던 카투사로, 이 중 2명은 미7사단 15전차대대 소속 김용수 일병과 이갑수 일병으로 신원이 확인됐다.

김 일병은 1933년 부산에서 태어나 17세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뒤 미7사단에 배속돼 북진하다 1950년 12월 2일 장진호전투에서 산화했다. 지난해 숨을 거둔 형 김용환 씨가 2009년 ‘동생의 유해를 꼭 찾겠다’며 국방부에 제공한 유전자(DNA) 감식용 혈액이 신원 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됐다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이 일병은 1916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34세 때 아내와 4세, 7세이던 남매를 남겨놓고 참전해 1950년 12월 5일 장진호 인근 하갈우리 지역 전투에서 전사했다. 25일 공항에는 김 일병의 조카인 김해승 씨(54), 이 일병의 아들 이영찬 씨(66)와 딸 이숙자 씨(69)가 나와 유해를 맞이했다.
▼ 北에 묻힌 국군 유해 3만9000구 추정… 남북, 공동발굴 합의했지만 진전 없어 ▼

정부는 두 사람의 유해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중앙감식소에 임시 봉안한 뒤 유족과 안장 절차를 협의해 다음 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나머지 10명의 유해도 정밀감식과 관련 기록을 분석해 신원을 확인할 방침이다.

이들의 유해는 미국이 북한과 합동으로 6·25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미국은 2000∼2005년 장진호전투 지역에서 발굴한 미군 유해 226구를 하와이의 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JPAC)로 옮겨와 유전자 감식을 실시했다. 그 결과 12구가 아시아계 인종으로 확인되자 지난해 8월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 이를 통보했다. 유해의 치아 상태와 치아 보철, 함께 발견된 인식표 등을 볼 때 한국군 전사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양측은 서울과 하와이를 오가며 추가 조사를 벌인 결과 유해들이 한국군 전사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합동 정밀감식작업에 착수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은 미국 측에서 제공한 유해의 DNA 표본과 미리 확보한 유가족 1만9000여 명의 DNA 표본을 일일이 대조해 2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이번 유해 봉환을 계기로 북한 지역 내 국군 전사자 실태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금까지 수습하지 못한 국군 전사자 13만 명 중 3만9000여 명이 북한에 묻혀 있을 것으로 군은 추정하고 있다.

북한 지역 내 국군 유해는 북측의 협조가 없으면 수습할 수가 없어 국방부는 유엔을 통한 해결 등 다양한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남북은 2007년 11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국방장관회담에서 6·25 전사자 유해의 공동발굴에 합의하기도 했다. 이후 남측은 몇 차례 북측과 군사회담을 열어 합의 이행을 촉구했지만 북한의 무성의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방부는 목숨 바쳐 조국을 지킨 영웅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차원에서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할 방침이다.

한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발굴되는 유해의 신원과 유가족을 확인하기 위해 DNA 검사에 필요한 채혈을 하고 있다. 유가족은 전국 군 병원과 보건소, 유해발굴감식단에 제적등본이나 유가족증명서, 전사통지서를 지참해 방문하면 된다.
■ 美해병대 악몽 ‘장진호전투’
중공군 포위망 뚫고 후퇴… 혹한속 7000명 사망 가장 참혹
피란민 흥남 철수 시간 벌어


6·25전쟁 중인 1950년 11월 함경남도 개마고원 인근 장진호(湖)까지 진격했던 미국 최정예 해병1사단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까지 후퇴하며 벌인 전투다. 미 해병1사단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중공군과 처절한 사투를 거듭하며 철수하는 과정에서 부대원의 절반인 7000여 명을 잃었다. 이 희생 덕분에 중공군 12만 명의 남하는 상당기간 저지됐고, 북한 지역의 피란민 10만 명이 흥남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한국어로 된 지도가 없던 당시 일본어 표기인 ‘초신’으로 불렸던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초신 퓨(Chosin Few)’로 불린다. 그만큼 미 해병대 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겨울전투로 꼽힌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6·25 국군유해#봉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