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만 여명’ 작전]피랍 6일만에… 긴박했던 구출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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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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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58분, 배 왼쪽서 함포 쏘고 헬기로 위협 ‘성동격서’

21일 오전 4시 58분(한국 시간 오전 9시 58분). 오만 살랄라 항에서 동남쪽으로 458km 떨어진 인도양 공해상에서 어둠을 찢는 듯한 요란한 포성과 함께 불꽃이 솟아올랐다.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된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을 구출하기 위한 ‘아덴 만 여명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 4시간 58분 만에 끝난 구출작전


청해부대 소속 구축함 최영함은 127mm 함포는 물론 섬광탄, 최루가스탄, M60 기관총 수백 발을 삼호주얼리호 주변으로 쏘며 해적을 위협했다. 놀란 해적들이 우왕좌왕할 때 삼호주얼리호 선수 갑판과 선교 상공으로 링스헬기가 떠올랐다.

링스헬기는 갑판을 향해 K6 기관총을 발사했다. 헬기에 탄 저격수들이 선수 갑판에 있던 해적 2, 3명을 사살했다. 순식간에 선교 부분이 총탄으로 벌집처럼 되자 해적들은 기관실 격실 안으로 숨어 들어갔다. 최영함과 헬기의 스피커에서는 ‘우리 군이 곧 진입하니 바닥에 바짝 엎드려 달라’는 한국어 방송이 흘러나왔다. 인질들에게 보내는 한국어 메시지를 해적들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링스헬기가 삼호주얼리호 선수에 공격을 가해 해적들을 갑판에서 선교 안으로 몰아낸 틈을 타 고속단정 3대에 나눠 탄 해군 특수전여단 수중파괴대(UDT) 특수요원 20여 명이 삼호주얼리호 선미로 은밀히 접근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이었다. 링스헬기와 고속단정이 접근하는 동안 최영함에서는 전자 빔을 발사해 삼호주얼리호의 레이더와 영상이 작동하지 못하게 했다.

줄사다리를 이용해 승선에 성공한 특수요원들은 배를 차례로 접수하기 시작했다. 우선 선교로 진입했다. AK 소총을 쏘며 저항하는 해적들을 진압하고 선교 안으로 들어가니 한국인 선원 대부분이 모여 있었다. 한국인 인질을 먼저 구출한 것이다. 하지만 특수요원들이 삼호주얼리호에 승선해 해적들을 제압해 나가자 해적 1명이 선장 석해균 씨를 붙잡고 저항하는 바람에 석 씨가 해적이 쏜 총에 배를 맞았다.

갑판과 선교를 장악한 특수요원들은 격실과 기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특수요원들은 2개 팀으로 나눠 57개의 격실을 일일이 확인해 해적들을 사살 또는 생포했다. 확인한 격실 문에는 ‘×’ 표시를 해뒀다. 인질 21명을 모두 구출한 것은 오후 1시 47분(이하 한국 시간)이었다.

차례로 인질들을 구출하던 특수요원들은 기관실과 격실에 숨은 해적 4명과 치열한 마지막 교전을 벌였다. 소총과 기관총, RPG-7 로켓포로 무장한 해적들은 마지막까지 극렬하게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해적 2명이 사살되고 2명은 생포됐다. 교전은 작전 개시 3시간 만에 사실상 완료됐다.

이후에도 특수요원들은 선박 내부를 샅샅이 뒤지며 혹시 남아 있을 해적들을 찾았다. 최영함에서 출격해 선박 내부 전체를 모두 확인하기까지 총 4시간 58분이 걸린 것이다. 작전 종료와 함께 파악된 전과는 해적 13명 중 8명 사살, 5명 생포였다.

특수요원들의 삼호주얼리호 진입부터 인질 구출 완료까지 작전 상황은 실시간 영상으로 최영함 지휘부와 합참 지휘통제실에 전달됐다. 특수요원이 착용한 헬멧에는 카메라가 1대씩 장착돼 있어 영상 전송이 가능했다.

이날 작전은 20일 오후 5시 12분 이명박 대통령의 사전 작전 승인을 받아놓은 한민구 합참의장의 명령으로 전격 실시됐다. 한 의장은 소말리아에서 해적 모선(母船)이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모선이 도착하기 전 구출작전 결행을 지시했다. 해적 모선은 15일 자선(子船)을 내려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한 뒤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 삼호주얼리호로부터 592km까지 접근해 있었다.

○ 돋보인 연합함대의 공조작전

최영함의 인질 구출 작전 성공에는 아덴 만 일대에서 해적 퇴치 임무를 수행하는 연합함대의 도움도 컸다.

무엇보다 미군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미군의 P-3C 해상초계기는 삼호주얼리호에 있는 해적의 무장 상태와 위치 등을 파악해 최영함에 전달했다. 미군 구축함도 작전 당시 삼호주얼리호로부터 370km 떨어진 해상에서 대기했다. 구출작전 과정에서 부상당한 삼호주얼리호 선장 석 씨를 후송한 것도 미군 헬기였다.

석 씨는 체온이 떨어지는 등 위독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삼호주얼리호 상공에 대기하던 미군 헬기가 삼호주얼리호에 착륙해 석 씨를 최영함으로 긴급 수송했고 덕분에 응급처지를 제때 받은 석 씨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오만 해군의 지원도 있었다. 오만 경비함은 18일부터 21일 구출작전 때까지 줄곧 최영함과 함께 기동하며 측면 지원을 했다. 18일 1차 구출작전이 실패해 부상당한 특수요원 3명은 오만 헬기로 오만의 한 병원으로 후송됐다.

또 최영함이 16일 새벽 군사물자를 싣고 지부티 항을 출발해 이틀 만인 18일 오전 4시 삼호주얼리호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은 파키스탄 구축함 덕분이었다. 삼호주얼리호가 납치될 당시 가장 가까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파키스탄 구축함이 삼호주얼리호를 계속 따라가며 최영함에 삼호주얼리호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준 것이다.
▼ 3일전 고속단정 접근하다 발각, 아군 3명 총상… 계속 따라가며 투항권고 ▼
1차 작전때 링스헬기로 해적 자선 격파… 4명 풍덩

아덴 만 여명작전의 성공은 앞서 한 차례의 쓰디쓴 실패를 딛고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최영함 함장 조영주 대령은 18일 오후 8시 9분 구출작전 개시를 명령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조 대령에게 해적 4명이 자선을 타고 삼호주얼리호를 떠나는 것이 목격됐기 때문이다. 해적 전력이 삼호주얼리호와 자선으로 분산돼 약화된 만큼 기회라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선장인 석 씨는 기지를 발휘해 “배에 이상이 있다”며 해적을 속여 삼호주얼리호는 살랄라 항에서 600여 km 떨어진 해상에서 멈춰 있었다.

삼호주얼리호로부터 3.6km 떨어져 있던 최영함에서 링스헬기 1대와 특수요원 10여 명을 나눠 태운 고속단정 2대가 출발했다. 링스헬기는 삼호주얼리호에서 바다로 내려온 10m 크기의 흰색 해적 자선에 격파사격을 가했다. 자선에 타고 있던 해적 4명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해적의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삼호주얼리호로 은밀히 접근하던 고속단정은 해적에게 발각돼 소총 공격을 받았다. 요원 3명이 총에 맞아 1명은 등에 파편이 꽂혔고, 나머지 2명은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 부상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작전 수행은 무리였다. 고속단정은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1차 구출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뒤 2차 작전을 펴기까지 3일 동안 최영함은 삼호주얼리호와 3.6km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 따라가며 소말리아어로 투항을 권고하는 심리전을 폈다. 상선의 무선통신망을 통해서였다. 최영함은 간간이 M60 기관총으로 삼호주얼리호 주변 해상을 향해 경고사격을 하기도 했다. 해적의 피로도를 높이기 위한 전술이었다. 해적들은 삼호주얼리호 선장을 통해 수시로 삼호해운 측과 교신을 하며 인질들의 몸값을 요구했다.

한때 해적 지원세력으로 추정되는 선박이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해 긴장감이 높아지기도 했다. 19일 오전 3시 22분 삼호주얼리호에서 13km 떨어진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박 1척이 삼호주얼리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포착된 것이다. 최영함은 해적을 지원하려는 세력으로 추정해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했다.

하지만 배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를 벌인 끝에 낮 12시 46분부터 오후 1시 33분까지 이 선박에 대한 강제 검색을 실시했다. 이 선박은 이란 국기를 달고 있었고 선원 16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 선원을 최영함으로 이송해 조사한 결과 이 선박은 해적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내리고 오후 5시 선원을 훈방 조치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동영상=해군 특수전여단(UDT/SEAL) ‘삼호 주얼리’ 이렇게 구출했다.





▲동영상=청해부대 출동에 해적 ‘줄행랑’…첫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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