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468명 집단입국, 그 후 5년]<3> 음지에 숨은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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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선 교사였는데 여기선 막일밖에…” 3년째 빈집서 눈물

할 수 있는 게 없으니…“눈이 아프지만 이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탈북자 이은숙 씨(63)는 집에서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이 씨의 아파트에는 남한 노인들이 많이 살지만 교류는 없다. 이 씨는 “생각이 다르니 말도 잘 안 통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주로 집에 있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 사진 더 보기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눈이 아프지만 이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탈북자 이은숙 씨(63)는 집에서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이 씨의 아파트에는 남한 노인들이 많이 살지만 교류는 없다. 이 씨는 “생각이 다르니 말도 잘 안 통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주로 집에 있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 사진 더 보기
탈북자 김지은(이하 가명·32) 씨에게는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49m²(15평) 임대아파트가 세상의 전부다. 3년째 하루 종일 집 안에서 살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시장에 가는 게 그의 유일한 외출이다. 5년 동안 제대로 된 직장도 못 구했고,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김 씨는 정부 지원금 50만 원으로 살아간다. 외출할 일이 없으니 돈 쓸 일도 없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 혼자 있으면 북한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눈물이 난다. 가끔 벽을 보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외친다.

그리움보다 더 김 씨를 괴롭히는 것은 남한에서 자신의 위치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북한 교원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교사라는 직업에 긍지를 가지고 살았다. 북한에서의 삶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찾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남한으로 왔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할 일은 없었다. 남한에서도 교단에 서고 싶었지만 북한에서의 교사 경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식당 일밖에 없었다. 굳은 마음을 먹고 며칠 식당에 나갔지만 오래 할 수 없었다. 일도 힘들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아파트에서 벽에 달린 커튼 봉을 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무 외로워요.”

○ 음지로 숨은 탈북자

탈북자들 중에는 남한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함께 입국한 탈북자들과도 소식을 끊은 채 은둔하며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탈북자들은 추첨을 통해 거주지가 무작위로 결정돼 이웃과 어울리기 힘들기 때문에 직장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다. 하지만 취재팀이 만난 탈북자 200명 중 62명(31%)이 무직 상태였다. 무직자 62명 중에는 구직 활동을 아예 포기한 사람도 30명이나 됐다. 구직을 포기한 30명 중에는 이웃이나 동료 탈북자 등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사람도 17명이었다.

일부 탈북자는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극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김성일 씨(50)는 남한에 온 지 3년 만에 알코올 의존증으로 입원했다. 그는 정착 초기 적극적으로 일거리를 찾는 등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철거회사에서 7개월 동안 용접공으로 일했으나 5개월 치 월급을 못 받았다. 탈북자라고 차별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하루하루 술로 마음을 달래는 시간이 늘었다. 결국 2007년 알코올 의존증으로 9개월 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조인석 씨(56)는 경비, 주차관리, 주유소 등을 전전하며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려 했지만 머리가 아팠다. 병원에 가보니 신경질환이라고 했다. 조 씨는 “병으로 일용직마저 쉬다 보니 형편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고 말했다.

○ 탈북이 남긴 상처, 아픈 사람들

임미선 씨(34·여) 부부는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공안에 붙잡혀 열차로 북송되던 중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대로 잡혀갔다가는 바로 정치범 수용소로 향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한에 왔지만 임 씨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다. 조금만 피곤하면 얼굴이 붓고 허리가 아파 일을 할 엄두도 못 낸다. 남편도 열차에서 뛰어내릴 때의 충격으로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손을 잡고 도망쳤던 그날의 기억은 몸이 아플 때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임 씨 부부처럼 일부 탈북자는 북한 탈출 후 중국 등지를 떠도는 과정에서 얻은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돼 사회와 격리됐다. 취재팀이 만난 탈북자 200명 중 31명(15.5%)이 질병과 수술 후유증 등으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김경순 씨(43·여)는 탈북 과정에서 걸린 뇌수막염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회와 격리됐다. 김 씨는 한국에 오기 전 베트남에 머물던 중 배가 너무 고파 달팽이를 먹은 게 화근이었다. 김 씨는 남한에서 취직을 했지만 심한 두통으로 결근이 잦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탈북자 신분 감추고…

탈북자들은 자신의 신분 자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당시 입국한 468명 중 235명은 취재팀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하거나 아예 연락이 닿지 않았다. 취재팀이 2004년 7월 27, 28일 입국 탈북자 전부를 인터뷰하지 못한 이유다.

탈북자들이 신분 노출을 꺼리는 첫 번째 이유는 북한에 남겨둔 가족의 안전 문제 때문이다. 박미희 씨(40·여)는 2년 전 북한에 남아 있는 오빠와 전화 통화를 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남철복’이란 사람이 북한 당국에서 임무 받고 간 사람이야. 탈북자들이 사는 남조선 아파트 사진 찍고 주소까지 적어서 북한으로 돌아왔어.”

오빠 입에서 나온 ‘남철복’은 자신을 한때 ‘누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었다. 2007년 여름 같은 아파트에서 친하게 지내던 탈북자가 “혼인신고를 했다”며 남 씨를 소개했다. 넉살이 좋은 남 씨와는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기도 했다. 하지만 석 달 후 남 씨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고, 이후 여권을 만들어 외국으로 나갔다가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만 들었다.

박 씨는 오빠와 전화를 한 뒤 남 씨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눈 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300만 원을 보냈다. 박 씨는 “그때 이후로 아무리 외로워도 북한 사람들은 절대 만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신분을 감추는 것을 넘어 이름, 나이, 주민등록번호를 바꾸는 등 신분 세탁을 하기도 한다. 정민규 씨(43)는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법원에 달려가 ‘신변 보호’를 이유로 개명(改名) 신청을 했다. 구청에 가서 주민등록번호도 바꿨다. 가족들에게는 ‘중국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탈북자들은 북한에서는 배신자로 불리고 남한에서는 차별을 받아 불안감과 자괴감이 크다”며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하고 사회와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사회와 단절된 탈북자들에게 단순한 경제적 보조가 아니라 남한 사회에 적응하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줄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팀장=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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