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도 안갯속…“상황별 시나리오 100개 넘을것”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4월 21일 02시 57분



고심하는 정부


“중대문제 논의”만 밝혀
상대방이 누구인지 의제가 뭔지도 감감
北 억지요구 쏟아내도 뾰족한 대응책 없어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첫 남북 정부 당국 간 접촉을 하루 앞둔 20일 정부는 외교안보 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원칙을 지키면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대응한다’는 기조를 정했다. 그러나 회담을 준비하는 실무자들은 남북 당국자가 북한 지역에서 만난다는 것 외엔 통상적인 남북회담과 전혀 달라 준비에 고심하는 흔적이 역력했다. 누가 나올지도, 어떤 의제가 논의될지도 확정되지 않은 채 당국자 7명은 21일 오전 개성공단을 방문한다.

○ 회담의 형식도 내용도 감감
당국자들은 최악의 경우 지난해 10월 두 차례 열린 남북 군 당국 실무회담과 11월 ‘12·1 조치’ 통보 당시의 악몽이 되풀이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와 같이 북측이 회담장에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성명만 읽고 바로 퇴장해 버리는 시나리오가 최악”이라고 말했다.
북측은 논의할 의제에 대해 ‘개성공단 사업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라고만 밝힌 상태다. 한 당국자는 “북한이 준 단서만 가지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 경우의 수를 계산하면 100가지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남측이 볼 때 ‘좋은 일일 경우’ ‘나쁜 일일 경우’ ‘중간일 경우’로 쉽게 나누는 것이 편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북한이 21일 개성공단 기업들에 대한 추가 압박 조치를 통보하거나 특정 시일 내에 남한 인력을 일부 또는 전원 철수시키라고 요구할 경우 정부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개성공단 사업의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을 최대한 설득하는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 말했다.

○ 상대방이 누군지 현장에 가봐야 안다
통상적인 남북협상의 경우 양측이 사전에 참석자 명단을 주고받아 비공식으로 승인한 뒤 확정되면 쌍방 참석자의 사진과 이름, 소속 등이 박힌 앨범을 교환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측 명단은 북에 통보됐지만 북측 참석자는 통보받지 못했다.
김호년 통일부 대변인은 20일 브리핑에서 “북측에선 개성공단의 운영과 관련된 인사가 나올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북한의 개성공단 관리당국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의 김일근 총국장 또는 박명철 제1부총국장이 대표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북한이 대외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고 권력기관인 국방위원회 등에서 의외의 인사를 내세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북한의 대화 분위기 조성 가능성도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 대화가 당분간 어렵다고 보고 남한과 대화 분위기를 조성해 ‘위기관리’에 나설 수 있다는 기대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21일 접촉에서 이런 분위기가 감지되면 즉시 ‘협상모드’로 전환해 접촉의 계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나름의 탄력적인 대응 시나리오도 마련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당국자는 “다음 만남의 일정만 잡아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전망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전문가들 전망

개성공단 폐쇄 대신 ‘식물화’ 조치 가능성
억류자-PSI 연계 강경카드 꺼낼 수도
“일방 통보땐 거부해야”


21일 남북 당국 간 개성 접촉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대체로 낙관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통보할 가능성이 높으니 철저하게 준비해 남북 간 접촉의 끈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들은 또 북한은 개성공단사업 전반 또는 개성공단 억류자 신변 문제를 정부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 문제와 연계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 “개성공단에서 짐 싸라?”
양무진 경남대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20일 “북한이 중대사안을 통보한다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남측이 PSI 전면 참여를 발표하면 이는 대북 선전포고이므로 개성공단 폐쇄를 비롯한 남북 관계의 전면 차단으로 대응하겠다고 주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북측은 이를 상부의 위임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나설 것이기 때문에 대략 30분 내로 통보 절차를 끝내고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의 전면적 폐쇄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사실상 폐쇄에 준하는 ‘식물화’ 조치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개성공단을 PSI와 연계시켜 우리에게 양단간에 결정을 하라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이 지난해 10월 군사 실무접촉 때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우리 측의 반응을 보는 수법을 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북한이 억류된 직원 문제가 기존 위반사항보다 더 심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도 “북한은 억류 근로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통보하고 그를 스파이로 모는 등 중차대한 혐의를 덮어씌울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는 “북한이 고압적이고 강압적이겠지만 내부 역할 분담에 따라 이번 접촉에선 PSI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인 유창근 에스제이테크 대표이사도 “아마도 주재원의 신변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라며 “상부의 지시를 전달하는 방식일 텐데 주재원 압송 등 내부 절차를 공식화하려는 수순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 “일방적 통보라면 거부도 대응 방안”
북한의 요구가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방적인 주장이라면 북측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양 교수는 “남북 간 회담도 아닌데 7명이나 되는 남측 대표단이 올라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대목”이라며 “다만 북한이 일방적인 통보를 한다면 이에 응할 수 없다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북한이 PSI를 거론할 때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숙고해야 한다”며 “우리가 PSI 전면 참여를 전술적으로 뒤로 미뤄놓겠다고 정리한 뒤 북한과 접촉한다면 아마도 다음 접촉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 센터장은 “북한이 억류 근로자 문제의 책임을 우리 정부에 떠넘기려 한다면 우리 측은 북측 주장과 상관없이 신변안전 문제는 다른 문제라고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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