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에선 쉴새없는 전화로 ‘정중동’ 조정
“박 차관은 마치 ‘백조’처럼 움직이고 있다.”
1월 20일 취임한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의 두 달을 지켜본 한 총리실 직원의 소감이다.
물 위로는 평온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수면 밑에서는 분주히 발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총리실 내에서의 그의 위상은 첫날부터 달랐다.
박 차장이 취임한 날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세종로 정부중앙청사도 어수선했다.
박 차장은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자마자 취임식도 하기 전에 긴급대책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박 차장이 임명장을 받느라 대책회의가 늦어졌다. 그러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또 다른 ‘실세 차관’인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이 총리실 직원들에게 “일 똑바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
한 총리실 직원은 “‘실세 차관’이 온다고 해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다른 부처 차관에게 혼이 나 더 주눅이 들었고 새삼 ‘실세’가 어떤 것인지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차관급’인 박 차장의 취임식에 기자들이 대거 몰려온 것이나, ‘일개’ 차관이 취임사에서 “청와대는 두뇌고 총리실은 심장”이라며 청와대와 대통령을 언급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청사 안팎에서는 그의 ‘힘’을 보여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박 차장이 주재한 회의에 부장검사가 아닌 평검사가 오자 박 차장이 그 검사를 돌려보내고 회의 자체를 취소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 부처의 국장은 “부처 간 회의에서 중심이 박 차장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차장은 요즘 자신에 대한 시선을 의식한 듯 몸을 낮추고 업무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무차장의 하루와 한 주는 회의로 시작해서 회의로 끝날 정도로 빡빡한 일정의 연속이다. 월요일 열리는 총리실 간부회의부터 국가정책조정회의, 차관회의 등 정례회의와 비정기적인 고위당정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해야 한다.
주요 국정 현안을 두루 챙기는 차관회의는 국무총리실장(장관)이 주재하지만 실무 준비는 국무차장실이 맡는다.
자신이 담당하는 고용사회안전망 태스크포스(TF), 쌀 직불금 TF 등을 직접 주재하고 총리의 지방 방문도 수행한다.
최근 총리실의 업무 조정으로 이명박 정부의 역점 사업인 ‘4대 강 살리기’도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유달리 통화량이 많다. 어떤 자리에서든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기 바쁘다. 한 공무원은 “자리를 비우기 쉽지 않은 직책이어서 필요한 외부 인사와는 전화로 접촉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차장의 외부 활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회의에서 그를 대한 각 부처 공무원들은 “박 차장이 ‘다양한 정보’가 많은 것 같다”고 평가한다. 공식 보고 외에도 정부 밖에서 현안에 관한 많은 정보를 받고 있다는 것.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청와대 내부 동향도 시시각각 그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차장은 취임 두 달을 앞두고 1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나는 원래 정치인이 아니라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을 하면서 온갖 정책을 다뤄본 ‘정책통’”이라며 “청와대보다 총리실이 편하다”고 말했다.
이날 박 차장은 정치 분야는 피하고 주로 정책에 대해 얘기했다. 각종 회의가 너무 많아서 통합하고 단순화하겠다고 말했고 부처 간의 이견을 조정하는 총리실이 자기 원칙과 기준이 없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심스러운 처신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런 한마디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파워가 느껴진다는 게 총리실 직원들의 얘기다. 박 차장이 한승수 총리의 중동 방문을 수행해 15일 출국하자 총리실 직원들 사이에서는 “두 달 만에 처음으로 긴장을 풀게 됐다”는 농담이 오갔다.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