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청와대에 ‘다모클레스의 劍’을

  • 입력 2008년 8월 21일 02시 50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라쿠사의 디오니시우스 왕에게 다모클레스라는 신하가 있었다. 다모클레스는 왕의 권세와 행운을 몹시 부러워했다. 왕은 어느 날 다모클레스를 연회에 초청해 자신의 자리에 앉혔다. 왕의 자리에 앉아 술잔을 든 다모클레스는 머리 위 천장에서 말총에 간신히 매달린 검(劍)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다모클레스의 검’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의 긴장과 불안, 행복에 따르는 위험을 상징한다.

대통령비서실의 요즘 분위기가 ‘다모클레스의 검’ 얘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달 9일 베이징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경기를 관전하면서 태극 문양과 4괘가 모두 뒤집힌 채 제작된 엉터리 국가상징 태극기를 흔들어 남우세스럽게 됐다. 대통령비서실이 대통령의 막중한 역할과 위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아마추어 집단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도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의 준비 매뉴얼에 ‘태극기 문양 제대로 챙기기’라는 체크 항목이 있었다. 대통령 의전 행사 전에는 태극기 점검이 의무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엉터리 태극기 사건’은 올림픽 열기에 묻혀 잊혀지는 듯했지만 13일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이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공 의원은 “반드시 책임자를 찾아 처벌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의 설명은 요령부득이다. 대통령이 처음 받은 태극기는 정상이었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뒤 엉터리 태극기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더 큰 문제다.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의 말처럼 ‘음모’가 있었는지도 모를 사건이 아닌가. 청와대는 아직 진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미스터리라고만 한다. 그러면서 잊혀지기만 기다리는 모양이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면 비슷한 사건이 재발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대통령이 엉터리 태극기를 흔들고 있을 때 주변에는 적어도 5, 6명의 ‘대통령의 사람들’이 있었다. 부인과 외교부 장관, 주중대사, 외교관 출신 의전비서관 그리고 경호원들이었다. 그런데도 태극기가 바뀌고 대통령이 엉터리 태극기를 흔들도록 내버려 둔 것은 아무도 대통령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청와대 측이 사후에 기자들에게 엠바고(보도 유예)를 요구하는 일이 잦은 것도 문제다. 대통령의 발언과 메시지는 보좌진에 의해 사전에 충분히 조율돼야 한다. 대통령을 각본에 충실한 연기자로 만드는 것도 비서진의 책임이고 능력이다.

청와대와 여권은 ‘촛불’이 꺼져가고 대통령 지지율이 조금 올라가자 기력을 회복하는 듯하다. 대통령도 자신감을 회복하고 개혁 드라이브에 재시동을 걸고 있다.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보좌진이 똑 부러지게 제 역할들을 못하고 느슨해져 있다면 촛불은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모른다. 촛불이 다시 타오르면 지금보다 훨씬 끄기 어려울 것이라는 정도는 대통령의 사람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에 ‘다모클레스의 검’ 한 자루를 걸어두라고 권하고 싶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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