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 100일]<3>고이즈미 ‘작은 정부’ 개혁 추진

  • 입력 2008년 6월 4일 03시 02분


“관(官)에서 민(民)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는 2001년 4월 집권하자마자 정부와 공공부문 개혁을 외쳤다. ‘자민당을 깨부수겠다’며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사표를 낸 ‘괴짜(헨진·變人)’ 총리의 등장이었다.

▽“개혁을 멈출 수 없다”=고이즈미 정권이 출범할 당시 일본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소위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장기불황 속에서 허우적대는 일본을 보며 국제사회 일각에서는 ‘일본발 세계 공황’의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때 괴짜 총리가 던진 승부수는 “개혁이 곧 경제성장”이었다.

그는 첫 조각에서 민간 학자 출신인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慶應)대 교수를 재정경제상으로 임명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총리 직속 경제재정자문회의를 구성해 다케나카 재정경제상과 ‘2인 3각’으로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이들에게서는 우정공사와 정책금융 민영화, 공무원 감축, 수도권 규제 및 노동 규제 완화, 특구(特區) 설치, 감세(減稅), 공공사업 반감(半減)을 비롯한 재정 개혁 등 ‘작은 정부’를 향한 개혁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고이즈미 정권은 30조 엔에 이르던 은행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기업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1500건의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했다.

▽개혁 반발을 정면돌파=그중에서도 고이즈미 총리가 정치생명을 걸고 단행한 우정공사 민영화는 ‘메이지(明治) 유신 이래 최대 개혁’이라 불린다.

당시 우정공사는 우편 예금 보험 등 3대 업무를 총괄하면서 개인금융자산의 4분의 1인 360조 엔을 보유했다. 전국의 점포 수 2만4000개, 상근직원만 27만 명에 이르는 공룡 조직이었다.

우정 민영화는 금융 재정 행정 사회뿐 아니라 정계까지 뒤흔들어 놓을 민감한 사안이었다. 우정 시스템이 그대로 정치권의 돈줄 겸 지방 조직 역할을 하는 구시대의 상징이었던 것. 여기에 메스를 댄다는 것은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정치개혁이기도 했다. 그만큼 정치권과 관료사회의 반발이 강했다.

‘정면승부’는 2005년 9월에 있었다. 중의원을 겨우 통과한 우정민영화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국민의 재신임을 묻는 9·11 총선을 실시했다. 그는 “우정 민영화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부르짖으며 “내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은 모두 저항세력”이라 몰아붙였다.

이 선거에서 일본 국민은 406석 중 296석을 자민당에 몰아주며 고이즈미 총리의 손을 들어줬다. 개혁이 힘을 받게 된 순간이다.

▽‘잃어버린 10년’에서 벗어난 자신감=일본 경제는 2002년 2월부터 조금씩 개선돼 전후 최장의 호황이라던 ‘이자나기 경기’(1965년 11월부터 57개월간)를 능가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이즈미 개혁이 일본 국민과 기업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아준 점이라고 전문가들은 평한다.

고이즈미 총리가 개혁 과정에서 항상 등에 업은 것은 ‘국민’이었다. 언론을 통한 국민 설득 전략도 동원했다. TV에 나오는 그의 언변은 어떤 드라마보다 재미있고 설득력 있어 ‘고이즈미 극장’이란 말까지 나왔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재임기간이 5년 5개월로 전후 세 번째로 장수한 총리의 기록을 세웠고, 퇴임 후에도 복귀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식지 않는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정 민영화 작업은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는 장기 계획이어서 아직 갈 길이 멀다. 게다가 고이즈미 전 총리의 개혁 노선은 이를 이어받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에서 혼미에 빠진 감이 적지 않다. 지난해 7월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선 자민당이 ‘역사적 참패’를 당해 중의원과 참의원의 제1당이 다른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이후 일본 정치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정체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지난달 29일 공무원 인사 일원화 등의 내용을 담은 국가공무원제도개혁 기본법안이 중의원을 통과하는 등 개혁의 흐름은 이어지고 있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 개혁 도우미 두 측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초강력 리더십’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다. 지근거리에서 ‘악역’을 마다 않고 그를 헌신적으로 뒷받침해 준 두 참모가 있었다.

35년간 고이즈미 전 총리를 헌신적으로 보좌한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전 총리정무비서관. 인사 문제로 정권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고이즈미 내각 5년 5개월간 금전 문제나 사생활 등의 추문으로 중도 하차한 각료는 한 명도 없었다.

개각 때마다 이지마 비서관이 개인 인맥을 총동원해 철저한 사전 검증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해 놓은 경찰, 정보기관, 언론계 인맥이 두루 활용됐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뒤를 이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에서 각료들이 각종 추문으로 잇달아 낙마할 때 일본 정가에서는 “아베 총리에게 이지마 같은 사람만 있었어도…”라는 말이 나왔다.

그는 독신인 고이즈미 전 총리의 여행가방을 직접 꾸려줄 정도로 가까이에서 총리를 보좌하면서 막후에서 실력을 행사해 ‘총리관저의 폭군’이란 별명을 얻었다. 지금도 “그가 말하는 것은 곧 고이즈미의 뜻”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고이즈미 전 총리의 신뢰를 받고 있다.

또 한 사람의 참모는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대 교수. ‘고이즈미 개혁의 사령탑’이라 불리는 사람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가 강력한 의지로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면 그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짜고 실행에 옮기는 책사 역할을 했다.

장관은 정치인이 하는 게 당연시되는 일본에서 민간인 출신인 그가 각료가 된 것 자체가 고이즈미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이후 그는 재정경제상, 총무상, 금융상 등으로 자리를 바꿔 가며 고이즈미 전 총리와 임기를 함께한 뒤 모든 자리를 깨끗이 버리고 학교로 돌아갔다.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됐지만 정계를 떠나면서 이 자리도 버렸다.

고이즈미 정권 내내 ‘다케나카 배싱(bashing·때리기)’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그에게는 ‘적’이 많았다. 개혁에 저항하는 관료와 기업인, 정치인에 때로는 언론도 가세했다. 그러나 “학자 출신이 뭘 안다고 설치느냐”는 비난에 시달리는 그를 고이즈미 전 총리는 철저히 옹호하고 밀어줬다. 훗날 그는 저서 ‘구조개혁의 진실’에서 고이즈미 전 총리가 거의 매일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후퇴하지 말라”며 용기를 주었다고 회고했다.

상아탑으로 돌아간 다케나카 교수가 요즘도 공개 석상에서 강조하는 것은 ‘개혁에서 리더의 중요성’과 ‘개혁속도론’이다. 개혁을 위해서는 리더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며 개혁은 빠른 결단과 집행으로 한꺼번에 해야 효과적이라는 지적이다.

■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거품경제 붕괴 이후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졌던 1990년대 10년간을 말한다.

1980년대 일본 경제는 사상 최대의 성장세를 보였다. 남아도는 자금은 증시와 부동산으로 몰렸다.

1985년 ‘플라자 합의’(G5 선진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을 돕기 위해 달러화 가치를 내리고 엔화 가치를 높이기로 한 합의)에 따른 엔고도 겹쳐 일본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등 세계 각지의 부동산에도 투자했다.

일본 내 부동산 가격도 폭등해 1990년 상업지역 토지가격은 1985년에 비해 4배 가까이 올랐다. 일본인들은 토지 가격은 반드시 상승한다는 ‘토지신화’를 믿고 빚을 내 토지를 사들였다. 거품의 붕괴는 1990년 시작됐다. 그해 8월 중동 위기로 엔화가 약세를 나타낸 데 이어 일본 정부가 토지가격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서 순식간에 거품 붕괴의 연쇄작용이 일어났다.

한 번 하락하기 시작한 토지가격은 80%나 폭락했다. 기업들의 도산이 이어졌고 부실 대출이 급증한 은행들은 도산 위기에 몰렸다. 또 소비심리가 얼어붙으면서 디플레이션이 깊어졌다. 실업률은 5%에 달했다.

1980년대만 해도 연평균 4.5%를 유지해 왔던 경제성장률은 1% 선으로 뚝 떨어졌고 정부가 어떤 부양책을 써도 반응이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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