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선 불법 행위인데…”法-인도주의 사이 딜레마

  • 입력 2007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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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적십자회가 올 2월 한국 평화문제연구소에 보내 온 ‘건의서’. 유통 기한이 지나 폐기 처분하는 의약품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한국제약협회
북한 적십자회가 올 2월 한국 평화문제연구소에 보내 온 ‘건의서’. 유통 기한이 지나 폐기 처분하는 의약품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다. 사진 제공 한국제약협회
《막대한 수해를 당한 북한 지역에 무더위까지 겹치면서 전염병 비상이 걸렸다고 국제적십자사연맹이 최근 밝혔다. 설사환자가 20% 급증하고 면역이 약한 어린이들 사이엔 급성 호흡기 질환도 속출하고 있다. 하지만 의약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반면 의약품 시장 10조 원 규모의 남한에서는 한 해 폐기되는 의약품만 500억∼800억 원에 이른다. 이 때문에 북측이 그동안 요청해 온 유통기한 초과 의약품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법과 도의의 문제=북한 적십자회는 2월 15일 남측 평화문제연구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건의서’를 팩스로 보내 왔다.

“선생님들도 알다시피 우리 북쪽은 의약품이 많이 부족합니다. …남측에서 제조한 의약품(유효 기간 종료일부터 6개월 또는 1년까지 날짜가 지났어도 허용됨)들은 우리에게 아주 귀중한 약품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기에 사용기간이 끝난 의약품을 폐기처분하지 말고 우리 북쪽으로 돌려주었으면 하는 요청을 담아 건의하는 바이니….”

북측은 지난해 10월에도 비슷한 건의서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남측으로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통 기한이 지난 약품을 법상, 도의상 보낼 수 없다는 견해가 많았다.

통일부의 한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기한이 지난 약품 유통을 불법으로 취급하면서 이를 북한에 보내는 것은 정부로선 승인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문경태 한국제약협회 부회장도 “몇 년 전 독일에서 광우병 파동으로 도살한 쇠고기를 북한에 보내 줬다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며 “주고도 욕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한 지나도 무해”=약이 없어 죽어 가는 북한 동포를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는 것이 과연 인도주의 정신에 부합되는가 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의 의약품은 유통 기한이 지나도 부작용이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신현택 숙명여대 의학정보연구소장은 “대부분의 약품은 보존 상태만 양호하면 유통기한이 지나도 효과가 좀 떨어질 뿐 인체에는 무해하다”고 밝혔다.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지낸 심창구 서울대 약대 교수도 “대부분 약은 유통 기한이 지나도 독성이 생기지 않는다”며 “간이품질검사를 거치면 얼마든지 북한에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현주 국제보건의료발전재단 북한지역팀장은 “안전성에 문제가 없는 약품은 유통기한을 따지지 말고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법과 인도주의를 절충할 묘안은=이처럼 법적 제약과 인도주의가 충돌하는 딜레마를 극복할 묘안은 없을까. 나름의 아이디어도 나온다.

정명천 대한약사회 약국위원회 차장은 “전문 의약품만 따져도 유통 기한이 남은 상태에서 폐기되는 ‘개봉 불용 제거의약품’이 2004∼2005회계연도에만 140억 원 규모”라고 말했다. ‘개봉 불용 제거의약품’이란 포장을 뜯었으나 처방전 변경으로 사용이 중단된 약품. 제약회사에 반품돼 대개 폐기 처분되는 이런 의약품을 북한에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약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약국에서는 보통 유통기한이 2개월 남은 약품을 제약회사에 반품한다. 국내 2만여 개의 약국이 북한 지원에 동참해 유통기한을 넘기지 않은 약을 빨리 반품하고 제약회사가 제때 수거해 북한에 보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제약회사는 반품량이 늘어나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제약회사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정부가 제약회사에 대북 의약품 지원에 연동한 보조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게 한국제약협회 측의 아이디어다.

정부, 北에 의약품 긴급지원

한편 보건복지부는 북한 이재민들의 질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수액제 해열제 항생제 등의 의약품 5억 원어치를 북한 수해지역에 긴급 지원하기로 했다고 23일 밝혔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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