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부적격자이거나 바보이거나

  • 입력 2007년 6월 21일 1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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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연설대에 혼자 서서 취임선서를 했다. 권력분립과 대통령 권력의 견제를 상징하는 대법원장도, 국회의장도 옆에 서지 않았다. 대관식으로 치면 제 손으로 왕관을 쓴 셈이다.’

2003년 4월 17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한국 관련 특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을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그냥 지나쳤던 장면이 민주주의의 산실이면서 왕실을 두고 있는 영국인 기자의 눈엔 기이했던 모양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無限행진

노 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 씨가 대통령을 ‘나라의 왕’으로 표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는 참여정부평가포럼 홈페이지에 인격모독 보도라고 주장했지만 ‘표현력 부족으로 사소한 오해의 소지는 있었을지라도’라고 토를 달아놓은 걸로 보아 없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고맙게도 안 씨는 ‘대통령의 통치력 하나로 법과 제도를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는 낡은 정치문화가 꼭 극복돼야 한다’고 주장해 줬다. 참여정부야말로 낡은 정치문화임이 다시 한 번 분명해졌다. 대통령이 법과 제도를 무시하지 않고서야 연거푸 선거법을 위반하고도 이를 지적한 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순 없다.

대통령의 ‘동업자’로, 관직 아닌 관직 ‘좌(左)희정’으로 참여정부의 틀을 짜 온 안 씨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의 옷감 짜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그림책에는 이 직조공이 ‘바보한테는 안 보이는 옷감’이라는 말로 온 나라를 속였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원문엔 ‘부적격자나 바보’로 돼 있다. 보신에 눈먼 신하들은 물론 허점 많은 왕의 허를 찌르는 기막힌 전술이다.

눈에 뵈지도 않고, 실용적이지도 못한 것이 참여정부의 이념과 정책이었다.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이를 미래 세대에까지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교육의 자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했던 노(老)교육학자가 이를 죽이는 대입정책에 총대를 메는 건 ‘부적격자 아님’을 입증하려는 안간힘 같아 안쓰럽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도 시장경제의 전도사로 꼽히던 정통 경제 관료였다. 그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오래 가면 상당한 해악(substantial harm)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주택 규제에도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인 그가 나섰다. 동화 속의 독백처럼 ‘난 바보는 아니니까 그럼 자격이 없다는 얘기인데, 남들이 알게 할 순 없지’ 싶어 “건설업이 침체돼도 부동산은 정상으로 돌려놔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던 게 아닌지 궁금하다.

비겁한 침묵의 동맹을 깬 건 “하지만 임금님은 아무것도 안 입었네요” 하고 말한 작은 아이였다. 덴마크에서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언론인 모임이 탄생한 것이 1835년, 안데르센이 ‘벌거벗은 임금님’을 쓰기 2년 전이었다. 이 대목을 안 썼다가 출간 직전 꼬마를 등장시켰다니 안데르센도 진실을 폭로하는 언론의 중요성을 의식했다고 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왕은 그 말이 맞다고 여기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가야 한다고 되뇌면서 더 당당하게 행진했다. 이제 와서 벌거벗은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입때껏 부적격 왕이 나라를 다스려 왔음을 자복하는 것과 다름없다. 더구나 왕은 임기도 없다! 나중에 그놈의 아이를 붙잡아 혼쭐을 내거나, 온 백성에게 왕이 하사한 보이지 않는 옷을 입도록 명령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5년 단임이라 그나마 다행

벗은 채로 해외까지 나갈까 봐 걱정스러운 건 지각(知覺) 있는 사람 생각이고, “온 세상의 부적격자와 바보를 가려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그래도 반대하는 ‘수구세력’에 “그럼 부적격자와 바보를 그냥 두자는 말이냐”고 역공한다면 할 말도 없어진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아무리 그럴듯하고 신묘한 옷감이라도 시장에서 잘 팔리고 세계에서 검증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에겐 5년 단임 대통령제라는 자랑스러운 헌법이 있다. ‘왕의 남자’들이 기세등등해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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